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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21 (수요일)

천하국가론의 국가비전임채원 경희대 교수미국 트럼프정부는 한국산 철강에 예상을 뛰어넘는 무역규제를 시작했다. 무역분쟁을 둘러싼 문법은 근본부터 바뀌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정부와 기업에 익숙한 GATT와 WTO식 대응은 갈수록 그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트럼프정부는 자신들의 지지세력인 백인 저소득층이 원하는 정치를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공화당 정권을 유지하는 동력을 찾아갈 것이다. 미국 제조업은 이미 경쟁력을 잃었지만,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한 트럼프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은 비가역적이다. 트럼프정부뿐만 아니라 그 뒤에 등장하는 포퓰리즘 정부들도 이런 추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1980년 이후 한 방향으로 달려왔던 세계화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변화의 진앙은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단일시장을 추구하면서 세계화를 주도했던 미국과 유럽국가들이다. 세계화는 서구중심의 가치를 중심으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해 왔지만, 세계화의 수혜는 미국과 유럽에서조차 중산층을 소외시키고 월가와 글로벌 기업에만 집중됐다. 철강과 자동차 등 전통적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백인 저소득층은 더이상 이런 상황을 감내하지 못했다. 그들의 불만과 분노는 정치적으로 폭발했고, 그 기반 위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보호주의라는 거대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의 한 시대가 가고 보호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왔다. 이 흐름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현실이 되고 있다. 지금 시대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에 있었던 전간기의 세계정세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당시 국제정치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어느 한 국가도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와 각각의 블록을 형성했다. 하나의 세계질서가 여러 개의 지역주의로 폐쇄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트럼프 시대 이후 세계질서도 전간기처럼 지역단위로 나뉘는 경향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국가를 중심으로 한 경제단위가 아니라 문명권으로 묶어볼 수도 있다. 또 지금은 정치권력 중심의 하드파워보다는 문화나 네트워크의 소프트파워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는 시대다. 전간기와 달리 세계시민들의 공동체적인 연대도 중요해지고 있다. 그래서 초민족 공동체(Metaethnic community)를 기초로 한 문명권이 한 세대 이상 중요한 세계질서의 흐름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나 영국의 싱크탱크인 경제경영연구소(CEBR) 등에서 내놓은 장래 30년의 전망을 종합하면, 문명론의 관점에서 6개의 문명과 다수의 주변 문명으로 분화되는 세계질서를 예측할 수 있다. 기독교의 미국 문명, 유럽연합 문제를 둘러싸고 통합을 모색하는 유럽 문명, 가톨릭과 라틴 문화의 브라질 문명, 동남아 이슬람의 중심으로서 인도네시아 문명, 남아시아의 인도문명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이 이에 해당한다. 러시아 문명과 중동 이슬람 문명은 석유가격 하락 등의 여러 변수로 인해 주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이 문명들이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생성과 성장, 성숙, 해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문명들과 충돌하고 조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 곁에 왔다. 이 문명권 중에서 가장 정치적 갈등이 첨예하고 군사적 갈등이 심한 곳이 동아시아 문명이다. 북한 핵 문제는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정치에서 초미의 관심이 됐고 한·중·일은 영토 문제 등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을 포함해 이 지역의 군비경쟁은 과거 미국과 러시아의 경쟁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지난 1세기 동안 유럽은 경제공동체로 출발, 유럽연합이라는 단일 공동체로 통합됐지만 동아시아에서 이런 공동체적 연대가 요원하다. 그러면 동아시아 공동체는 어떤 근거에서 모색될 수 있을까. 동아시아 문명권을 하나의 문명권으로 묶을 수 있는 개념의 틀은 공자가 제시한 '천하국가(天下國家)' 이론이다. 동아시아 문명은 개인적 수양론에서 출발한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시작, 최종목적지인 평천하(平天下)까지 향하고 있다. 제가(齊家)가 사적영역에 관한 통제라고 한다면 치국(治國)은 공적영역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었다. 동아시아 문명론의 새로운 가능성은 그 넘어에 있는 평천하다. 공자가 천하국가론을 제시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개별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통찰력과 원대한 그림을 공자 이전부터 상상하고 있었다. 봉건시대를 넘어 국가주의 시대를 거쳐 '세계화 이후' 시대에 동아시아 문명론이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천하국가론은 <중용>에서 구체적으로 나온다. <중용>에서는 '천하국가는 가균야(可均也)'라며, 천하국가는 개인과 국가를 고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개별국가의 이익과 주장이 골고루 균등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는 세계화보다는 지역주의가 더 보편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전간기와 달리 블록경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네트워크가 세계시민 속에서 공유되는 새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국가비전을 동아시아 문명의 천하국가론으로 모색하면서 이 나라가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일본과 중국의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담대한 비전을 주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임채원 경희대 교수 


이상화-고다이라 포옹과 한일관계의 미래최한영 정경부 기자18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500m 경기장면.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올림픽 기록을 경신하며 1위에 오르자 자국 팬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이 때 고다이라는 바로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조에 속한 이상화 선수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이상화는 경기 후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은메달이 확정된 뒤 트랙을 돌며 눈물을 훔치는 그에게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가 다가왔다.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격려하며 끌어안았고, 이상화도 웃으며 고다이라의 우승을 축하했다. 국적과 결과를 떠나 스포츠 정신을 보여준 최고의 장면이었다. 여기서만큼은 위안부·독도 영유권 문제를 비롯해 한일 간 해묵은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좋지 않다. 당분간 나아질 가능성도 적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이 큰 몫을 한다. 아베 총리는 방한 중이던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위안부 합의는 국가 대 국가의 합의로,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야 한다는 게 국제적 원칙”이라며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최근 도쿄 시내 한복판에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전시관도 개설됐다. 일본의 이같은 움직임 속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고려해 과거사와는 투트랙(two-track)으로 접근하겠다”는 문재인정부의 입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와 별개로 많은 이들이 바람직한 한일관계 정립 필요성을 피력한다. 110여 년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말한 “아시아의 평화·번영을 위해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보편적인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말도 총론적으로 옳다. 문제는 방법이다. 위로부터의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안부·독도 문제를 정치권이 제기할 때마다 양국 국민이 발끈하고 자국 지도부를 지지하는 악순환은 지금껏 되풀이되어 왔다. 양국 시민·사회단체를 포함한 밑에서부터의 점진적인 연대가 대안이다. 일본 내 양심적인 세력과의 대화가 큰 물줄기로 이어질 때 지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같은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고, 김 대통령은 일본이 2차세계대전 후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해온 점을 높이 평가했다. 20년 전 양국이 이룩한 성과를 지금 이뤄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본에도 양심적인 세력은 충분히 있다. 이상화·고다이라 선수의 포옹 장면을 놓고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시민적 연민과 우정, 연대”라는 평을 내놨다. 두 선수의 포옹이 바람직한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우연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 헛된 희망일까. 최한영 정경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