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마Ⅱ(은퇴한 사람들의 해외 마을 만들기)는 단순한 은퇴자 주거 모델이 아닌, 초고령 사회와 기후위기 시대에 국가와 개인이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국가 전략입니다. 해외 거점에 형성될 은퇴자 커뮤니티는 항공·관광·헬스케어·부동산 산업을 잇는 신수요를 만들고, 동시에 한국 기업과 스타트업의 교두보가 됩니다. 거점도시는 결국 한국형 개발협력(ODA), 글로벌 공급망 전략, 문화 교류의 실제 인프라가 됩니다. 은사마Ⅱ의 1차 거점은 라오스 비엔티안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두 도시 거주자들의 기고를 통해 이 전략의 향후 전개 방향을 살펴봅니다. 본 기획에서는 한국 기업의 극동 러시아 진출 교두보이자 항만·물류·관광·에너지 산업이 교차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펼쳐지는 한러·유라시아 교류의 현장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편집자 주)
연해주, 동북아 3억명과 맞닿은 거대한 공간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러시아 연해주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1.65배 정도로 생각보다 큰 지역입니다. 이 넓은 면적에 겨우 200만명 이하의 적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주도(州都)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약 65만명, 우수리스크와 나호트카에 각각 20만명, 그리고 기타 중소 도시들이 5만명 이하 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 연해주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지방의 작은 소도시 정도로만 여겨져왔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어 그 지리적 특징이 부각되면서 러시아 연방정부 입장에서도 연해주의 전략적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은 중국에서 가장 성장이 늦은 지역이지만 약 1억200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남쪽에 접한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구 8000만명도 결코 작지 않은 동북아의 경제권입니다. 여기에 일본과도 동해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권역의 관점에서 보면 연해주는 주변 3억명 이상의 외국인들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핵심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모스크바까지의 거리 9288㎞가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흔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부동항'이라고 불립니다. 태평양을 통해 전 세계와 직접 소통할 수 있고, 겨울에도 얼지 않아 사계절 운영이 가능한 항구는 넓은 러시아 내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입니다.
TSR(Trans Siberian Railway)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점도 바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자연스레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무역과 물류업이 중심 산업이 되어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기차역은 시내 중심과 바로 붙어 있어 수많은 물건들과 사람들이 매일 오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기차역 플랫폼에는 2차 세계대전 무렵 운행된 열차가 기념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차역이 TSR의 출발과 종착 지점이라는 내용과 함께 모스크바까지의 거리인 9288㎞가 새겨진 조형물 앞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습니다.
빠르게 확장되는 연해주의 물류·수산·농업·자원 벨트
인근 국가들의 성장에 따라 물류업도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다 보면 최근 몇 년 사이 도로 양 옆으로 대규모 물류 창고들이 새로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류업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이 지역의 가장 큰 산업은 수산업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는 상업항(Commercial Port)과 수산항(Fishery Port)로 나뉘어 있으며, 이는 수산업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입니다. 과거에는 수산물을 원물 그대로 수출하는 비중이 컸지만 현재는 현지 1차 가공 후 냉동·유통하는 물량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에 따라 물류 창고들도 더 확장되고 있습니다.
농업과 축산업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의 연해주 진출이 10년 차가 되면서 우수리스크 지역의 콩·옥수수 같은 대규모 농장의 생산성과 수익률이 크게 향상됐습니다. 중국 동북3성 등 인접 지역의 경제성장에 따른 시장 확대가 연해주 산업 발전의 주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장 수요가 넓어지면서 콩·옥수수 같은 대규모 작물뿐 아니라 배추, 양상추, 무, 감자, 당근 등 각종 채소류 농업도 확대되고 있으며, 돼지·닭·달걀 같은 축산업 규모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연해주 내수시장에 머물던 소규모 생산 산업들이 주변 국가의 수요에 맞춰 빠르게 대형화하는 모습입니다.
연해주 북쪽 내륙지역에는 금, 은, 텅스텐, 구리, 희토류 등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광활한 산림지역도 있습니다. 북쪽의 나호트카·보스토치니 항구는 러시아 석탄 수출의 핵심 통로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여전히 러시아산 석탄과 액화천연가스(LNG)의 주요 고객입니다.
LNG 산업은 러시아 정부가 오랫동안 개발해온 북쪽 가스전, 북극항로, 저장시설, 쇄빙 LNG운반선 등이 얽혀 있는 분야입니다. 북극항로에서 운항될 수많은 선박들이 연해주 발쇼이카멘의 즈베즈다 조선소에서 건조되고 있습니다. 이 조선소의 성공을 위해서는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전경. (사진=유리 시바첸코)
미개발과 가능성의 땅 연해주, 한국과 열어갈 다음 시대
러시아는 주어진 천연자원을 서둘러 개발하거나 낭비하지 않습니다. 산림 자원, 에너지 자원뿐 아니라 농·수·축산물 자원에도 여전히 미개발 영역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북아의 성장 속도를 고려하면 연해주의 이런 미개발 산업 분야는 한국 정부와 기업, 그리고 부지런하고 똑똑한 한국인들에게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기회로 다가옵니다.
미개발 지역과 자연을 조화롭게 개발한다면 관광산업이라는 또 다른 신세계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한 해에만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한국인은 40만명이었습니다. 연해주 정부와 한국관광공사는 펜데믹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2020년에는 80만명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저처럼 한국과 가까운 인연을 가진 많은 연해주 시민들에게는 그때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잠시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상상해봅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비행기가 하루 10회 이상 오가는 날을. 그렇게 오고 가는 한국인과 연해주 시민들이 함께 수많은 사업을 개발하고, 그 과정 속에서 함께 즐기고 행복해하는 날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생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200만명이 사는 연해주에 연간 100만명의 한국 손님이 찾아오는 그날이.
한국의 여러분들, 우리가 더 자주 더 가깝게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유리 시바첸코 루스퍼시픽그룹 컴퍼니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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