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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 23화)한강 다리가 품은 시간
“환도증명서 없이는 / 그 부교 건널 수 없다”
2019-04-01 06:00:00 2019-04-01 06:00:00
서울의 야경을 논할 때 한강 물결 위를 수놓는 많은 다리들의 자태와 불빛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서울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부산’ 하면 영도대교가 떠오르고 ‘여수’ 하면 돌산대교가 떠오르듯이, 한국의 다른 도시들에도 세계 곳곳의 도시들에도 강이나 바다를 가로지르며 랜드마크가 되어 지역의 풍광을 이루는 다리들이 많다. 각각의 다리는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 안에는 사람들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한강 물결 위를 수놓은 불빛과 다리의 모습. 사진/뉴시스
 
세월을 담은 다리
 
다리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몇백 년 된 다리든, 몇십 년 된 다리든, 자기 나이만큼의 세월이 깃든 각각의 다리에는 그 세월을 살았던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부산의 영도다리가 우리에게 친근하고 애틋한 이유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금순이와 헤어져 1·4후퇴 때 홀로 부산으로 피난 와 “국제시장 장사치”가 된 실향민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굳세어라 금순아, 1953년 작). “초생달만 외로이” 뜬 “영도다리 난간 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북통일 그날까지 “금순아 굳세어다오”라고 말하는 심정은 수백만 실향민뿐만 아니라, 실향민이 아닌 국민,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도 전파되고 공유된다.
 
근·현대의 우람한 대교들이 세워지기 전에도, 고려·조선시대 도성에는 다리들이 많았다. 고려의 개경(개성) 만월대 주변에는 송악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들을 건널 수 있게 여러 다리들이 놓아졌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려시대의 다리는 선죽교로, 이성계를 방문하고 돌아가던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일당에 의해 피살된 곳이다. 한편, 만부교에서 탁타교(낙타교)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사연을 가진 다리도 있다. 고려 태조 때 거란의 요나라가 고려와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냈는데, 태조 왕건은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 하여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어 굶겨 죽였다는 것이 이름이 바뀐 유래라 한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선죽교. 사진/뉴시스
 
조선시대 광통교는 태조 때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태종 10년(1410)에 폭우로 무너지자 돌로 다시 만들어진 다리이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 즉 정릉의 돌을 사용해 광통교를 축조했는데, 이는 자기 아들 방석을 세자로 옹립했던 강씨에 대한 원한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다리를 밟고 지나가게 하려던 의도라고 알려져 있다. 광통교는 이듬해(1411)에 만들어진 창덕궁 금천교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금천교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반면, 광통교는 일제강점기 경성 도시개발과정에서 원형을 잃어버리고 이후 청계천 복개사업 때 사라지고 만다.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제일의 다리로, 어가·사신 행렬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를 하던 이 역사적인 다리가 보존되지도, 복원되지도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예고 없는 교량 폭파, 한강철교와 인도교
 
임금쯤 되어야 ‘배다리’를 놓아 건너던 한강에 최초로 근대식 다리가 세워진 것은 1900년이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경인선 부설권과 교량 가설권을 따낸 미국인 모스(J. Morse)가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하면서 이 이권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일본은 공사를 빨리 마치기 위해 비용 절감을 이유로 대한제국 정부가 계약조건으로 명시했던 보도(步道) 가설을 이행하지 않은 채 한강철교를 완공했다. 1917년에 준공된 한강인도교는 여러 시절과 사건을 거치면서 제1한강교,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을축년 대홍수’(1925) 때 수난을 겪은 한강철교와 인도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미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막기 위해 사전 예고도, 통제도 없이 다리를 폭파해 수많은 서울시민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흑석동 아카시아숲 사이
강 건너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
 
석양머리 원효로 강기슭이 보였다
 
저 6월 하순의 그날밤
한강다리 폭파 굉음
나도 다리병신 되어
아버지와 함께 넋 잃고 뛰쳐나갔다
 
세상은 도둑뿐이었다
도둑뿐
거지들도 
결국 도둑이었다
 
< … >
(‘전태욱’, 19권)
 
6월 28일
인민군의 서울은 괴괴했다
귀신도 없는 
빈 적막
 
< … >
 
한강 인도교 폭파에서도 살아난 사람들
새로운 공포에 떨었다
남로당원들이 나타나고
그들은 숨어야 했다
 
남선전기 용산지점 배선과장 전우익 씨
한강 다리 위에서
가족 다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가 숨어야 했다
 
< … >
(‘전우익’, 18권)
 
6·25 한국전쟁 당시 폭파된 한강 철교. 사진/뉴시스
 
서울시민에 대한 피난조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투부대에 대한 철수명령도 없이 진행된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교량이 끊어져 대부분의 시민들이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았다. 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서울 안에 있으라는 연설을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낸 이승만이 바로 그 시각, 각료들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도망간 사실은 유명하다. 9·28 서울 수복과 함께 귀환한 경찰은 치안유지라는 명분으로 부역자 색출에 나서 ‘서울을 사수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안 떠난 시민들, 다리가 폭파되어 못 떠난 시민들을 괴롭혔다.
 
1차 피난시기에 서울을 떠난 사람들이 24~25만 명에 불과했던 반면,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1951년 1월 사이, 1·4후퇴시기에 피난을 떠난 숫자는 100만 명 이상이었다. 1951년 3월, 서울이 재수복되었지만 유엔군은 군사적인 이유로 정부와 서울시민의 환도를 금지했고 정부도 이에 따라 시민들의 귀환을 막게 된다. 그러나 경찰과 유엔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민들은 도강을 통해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시민들의 환도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면서 이들에게는 도강증, 농민복귀증, 귀향허가증(귀환증) 같은 것들이 요구되었고,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은 새로운 시민증을 발급받았다(강혜경, ‘한국전쟁기 서울 경찰과 후방치안’, <인문과학연구논총>(2013) 35, 185~192쪽). 
 
1952년 가을
한강철교가 복구되었다
제1차 수도 수복 직후
떼배로
건들건들 건너다녔다
떼배 뒤이어
부교 놓아 건너다녔다
환도증명서 없이는
그 부교 건널 수 없다
전쟁은 통 끝날 줄 모르고
중부전선에서
고지를 빼앗다 빼앗겼다 했다
제1차 수도 수복 직후
전쟁중의 일상이 이어졌다 먹고 자야 했다
 
< … >
(‘한강 소년’, 27권)
 
신문으로 본 한강인도교의 이야기들
 
“서울 시경에서는 새벽 3시40분 노량진에 거주하는 一(일)시민으로부터 ‘한강인도교에서 총소리가 요란하니 무슨 소리냐’는 연락을 받고 처음으로 군대가 서울로 진주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5·16쿠데타 날의 소묘 중 한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이보다 전인 1930년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는 안타까운 장면들이 인도교에서 벌어진다. “한강인도교위서 청년이 투신자살 8일 오전 11시반경에 원인미상·조사중”(조선중앙일보 1933년 10월 10일), “운전수의 제육감(第六感) 자살여성을 구조 14일 밤 한강인도교 부근에서”(매일신보 1934년 3월 16일), “한강인도교서 중국인이 투신”(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 “한강인도교 하에서 면도로 자살, 원인은 역시 생활난으로서 해고된 청년직공”(매일신보 1930년 11월 9일).
 
하지만,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려는 안타까운 사연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반가운 소식이 드물게 보이기도 한다. 도움을 청하는 쪽도, 도움을 주려는 쪽도 매우 인간적이어서, 일제강점기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신문기사를 현대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오래간만에 효험 본 <잠깐 참으시요> 한강인도교에 다러논[달아놓은] 패, 무직청년의 수서(手書)”(매일신보 1930년 4월 11일)
 
“팔일 아침에 부내(府內)종로서장에게 직업을 하나 소개하여 달라는 기막힌 편지 한 장이 왔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충남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 101번지에 본적을 두고 부내광화문통 192번지에 거주하는 리은중(21)으로 그 편지의 내용은 ‘나는 무산자의 자손으로 정황이 곤란하야 공부도 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경성에 왔습니다. 시골서 농사라도 하고자하나 마직이[마지기]의 땅도 없어 그도 못하고 무엇을 하고자 하야 경성에 오기는 왔으나 할 것은 고사하고 나갈 수도 없어 어젯밤에 한강에 가서 빠져 죽어버리려고 인도교에 찾아갔었습니다. 빠져 죽으려 한 때에 <잠깐 참으시요>라고 써 붙인 패를 보고 다시 마음을 돌리어 돌아와서 이 편지를 드리는 것이니 직업을 한 곳 소개하여 주시면 결초보은 하겠노라 운(云)’의 것으로 종로서에서는 목하 그의 직업을 얻어주려고 소개중이라 한다.” 
 
이제는 한강대교가 된 옛 인도교도, 사람들의 절망이 자주 향했던 마포대교도, 더 이상 투신 시도가 없는 다리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기를.
 
해마다 한강다리 투신자살이 늘면서 서울 마포대교에는 자살 예방 문구까지 걸렸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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