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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기자)프린스·들국화·냇 킹 콜…LP 턴테이블로 되감는 삶
한국서 하루키 '피터 캣' 꿈꾸는 김광현 재즈피플 편집장…"'밥보다 음악'이 내 신조"
판판판|김광현 지음|책밥상 펴냄
2019-08-09 06:00:00 2019-08-09 06: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우리나라에 하루키 '피터 캣' 같은 재즈카페가 생긴다? 판(LP) 15장만 주구장창 트는? 나 아주 멋진 단골 고객이 되고 말거야!'
 
아뿔사. 화단에 정강이를 세게 부딪혔다. 이런 황홀경에 취해 걷다 그만…. 멍이 남고 나서 아픔은 사라졌으나, 정강이를 찧을 당시 무릎을 탁 치게 만든 책의 상상은 여전히 가슴을 일렁인다.
 
문제의 책에 적힌 글은 이렇다. 가까운 미래, 한국 어딘가에 만들 재즈카페에 대한 구상이다. "자신감만 있다면 '판(LP)' 15개로도 (재즈카페를) 시작할 수 있다"는 하루키의 말이 과연 실현 가능할 지 따져 본 미래 재즈카페 주인의 '가상 검증'.
 
이 카페에서 트는 건 1950~60년대 굵직한 재즈사의 압축본이다. 아트 블래키에서 시작해 듀크 엘링턴과 존 콜트레인을 지나고, 지미 스미스와 웨스 몽고메리로 마무리 하는 여정. 하루키 못지 않은 대담성으로 이 주인장은 카페 상호명까지 지어놨다. '캔디(Candy)'. 재즈 트럼페터 리 모건이 1957년 발표한 앨범이자 블루노트 레코드 명반이 집중된 BLP1500시리즈를 빛낸 타이틀. 이 미래의 '캔디 주인장'은 "하루키 형이 (LP) 15장이면 된대요"하며 책 말미 자신의 꿈을 새긴다.
 
물론 15장의 앨범 만으로 '캔디'를 차릴 수 없다는 건 그가 더 잘 안다. 블루노트 레코드 1500, 4000 시리즈 중 최소 50여 장은 보유해야 웬만한 재즈카페 차림새가 난다. "15장이면 된다"던 하루키도 대략 7000장 정도의 재즈 LP를 가지고 있던 것 역시 안다. 그런데도 이 주인장은 왜 이런 농담 반의 15장의 앨범을 표로 그린 걸까.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려다가도 '앗, 이 앨범을 빠뜨렸네'라거나 '이건 좀 겹치는 느낌이야'라며 왜 이 목록을 적어 내려갔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면서야 느끼게 됐지만, 그것은 미래 이 '캔디 주인장'이 하루키 못지 않게 재즈와 음악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밥 보다 음악'을 신조로, 지난 20년 간 음악잡지를 만들어 온 김광현 재즈피플 편집장. 그는 최근 펴낸 책 '판판판'에서 1950년대 재즈부터 록, 1990년대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직접 추리고 고른 '인생 LP' 30장의 턴테이블 바늘을 얹으며 삶의 시간을 되감는다.
 
미소 짓게 하는 음악에 얽힌 세상사가 한 움큼이다. 이를 테면 가장 비싼 LP를 더듬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을 떠올리는 일은 꼭 꿈결 같다. 일본 한 중고매장의 앨범 무더기들 사이에서 아무 생각 없이 구매하고, 나중에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프린스의 황금색 사인. 사랑하는 딸이 둘 있는데 유언에 누구의 이름으로 남길지 고민하는 장면에 웃음이 터지고 만다.
 
그런가 하면 밴드 들국화의 '라이브 콘서트'는 그가 꼽지 '아니아니아니' 할 수 없는 명반. LP를 돌리며 추위를 뚫고 여학생(지금의 아내)과 동행한 남산 길을 떠올린다. 누벨바그풍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보며 졸다가도 스펀지처럼 스민 마일스 데이비스를 느끼고, 카시오페아의 1집과 감각적인 일러스트 커버를 감상하며 '시티 팝'의 경쾌한 미학을 알려준다.
 
깊은 음악적 조예가 빛나는 글들도 많다. 개인 일화나 신변잡기조차도 끝내 그의 업력 안에 포섭되고야 만다. 그래미 수상자 산타나의 '슈퍼내추럴' LP는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이 일었는데, 국내 에는 물량이 꽤 있었단다. 그건 한국이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늦게까지 LP를 제작한 국가였기 때문이란다.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유명한 곡 '테이크 파이브'는 실제 '5분간 휴식'을 하다 지어졌다고 한다. 멤버 폴 데스몬드가 5분간 커피 타임으로 쉴 때 연습 삼아 연주한 선율이 곡의발단이 됐단다.
 
읽는 풍미를 더하려면 관련 음악도 꼭 곁들이는 게 좋다. LP든, CD든, 유튜브든 해당 음악을 틀고 읽으면 설명마다 빨려 들어갈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일례로 재즈계 '왕중의 왕' 냇 킹 콜의 역사적인 첫 내한을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다. 1963년 3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이 '킹'이 택한 곡은 국내 민요 '아리랑'. "나룰 버뤼고 가쉬는 뉘믄. 쉽리도 못 가서 발평 난다." 어설픈 발음으로 열심히 진심을 다해 부르는 '킹'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다 보면, 저자가 이 곡을 택한 이유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프린스부터 들국화, 퀸, 냇 킹 콜, 한국 재즈 1세대에 이르기까지… 길에서 읽는다면 정강이를 조심하자. 앞을 못 볼 정도로 짜릿한 음악 삼매경에 빠져들 것이다.
 
 
'판판판'. 사진/책밥상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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