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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가 환생한 듯, 레드제플린 존 폴 존스 공연

2019-09-1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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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쫑긋 연 1시간 반 남짓. 세계는 온갖 소리의 순간성과 우연성, 그것이 잉태한 시공의 총합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2일 저녁 7시 서울 성수동 '플레이스 비브'에서 존 폴 존스(73)를 본 소감이다.
 
존스는 '전설의 밴드' 레드 제플린의 베이시스트이자 키보디스트. 1970~1980년대 헤비메탈을 주름잡던 이 밴드는 록의 살아 있는 역사다. 대중 음악 역사상 음반 판매량으로 줄을 세우면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 엘튼 존 등에 이은 6위. 세계적으로 약 3억장이 넘는 음반을 판 이 밴드의 '강한 록'은 헤비메탈의 형식미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드러머 존 본햄이 사망하면서 밴드는 해체했다. 밴드의 척추였던 그를 대체할 연주자가 없어서다. 지금도 명곡 '스타웨이 투 헤븐', '모비 딕'을 들어보면 본햄의 진가가 드러난다. 탁월했던 본햄의 강약 리듬조절을 대신할 연주자는 당시 없었다. 
 
밴드 해체 후 존스는 세계적인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음악적 외연을 확대했다. R.E.M, 브라이언 이노, 피터 가브리엘 등의 프로듀서로 활동했고 솔로 앨범도 두 장 냈다. 최근에는 오페라 곡 작업과 듀오 '선스 오브 치폴레(Sons of Chipotle)'로 활동 중이다. 
 
'선스 오브 치폴레'는 핀란드의 첼리스트 안시 카르투넨(59)과 결성한 팀. 그 흔한 유튜브 영상도 좀처럼 없는 유령 같은 듀오다. 공식 홈페이지에 적힌 소개 글 정도가 그들 표식의 전부. '광대한 음악 지도를 펼치는 전례가 없는 팀'
 
이날 저녁 7시 이들은 유령처럼 2층 회전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80여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30초간 그윽이 쳐다 보며 환한 미소로 받았다. 
 
이내 존스는 피아노 앞에, 아르투넨은 첼로 앞에 앉았다. 악기 연주로만 이어지는 거대한 항해의 돛이 올랐다. 존스는 왜 피아노가 줄을 건반에 연결된 망치로 소리를 쳐 내는 악기인지를 증명하려는 듯 했다.
 
건반 몇 개를 짧게 울리며 시작한 존스의 연주는 꼭 물결 파동이 잔잔히 이는 것과 같았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점차 다른 건반으로 옮겨 붙더니, 점차 격노한 태풍처럼 번져갔다.
 
손으로 치던 피아노는 곧 채로 뜯는 연주가 됐고, 관객들을 전혀 다른 차원의 음표 세상으로 이끌었다. 카르투넨은 첼로 소리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실험적일 수 있다는 명확한 예시를 보여줬다. 그는 음을 뜯다시피하는 활 연주와 현을 손으로 튕겨내는 피치카토를 자유로이 활용하며 존스의 영험한 예술 세계를 뒷받침했다. 
 
카페 겸 공연장인지라 현장에선 연주 내내 병이 부딪히는 소리와 냉장고 소리가 나기도 했는데, 이들 연주의 일부처럼 들렸다. 1부와 2부 사이 20분의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한 시간 남짓 열린 공연은 거대한 소리 실험으로 이뤄진 '아트'에 가까웠다. 
 
일흔이 넘은 노구 앞에 '경계'는 없었다. 연주와 잡음을 구분하기 힘든 소리의 합들은, 세상의 온갖 장벽들을 허물었다. 오리지널 악기와 기술의 합은, 새로운 개방의 세계를 열었다. 존스는 시종 피아노 위 아이패드를 터치하며 현의 소리를 전자적 색채로 시시각각 바꿔 댔다. 
 
1960~1970년대 국제 전위예술운동 플럭서스의 존 케이지를 연상시킬 소리적 순간성과 우연성. 실제로 워너뮤직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공연 당일까지도 존스는 "아직도 무슨 곡을 연주해야 할지 결정하지 않았다"며 "무대는 즉흥 연주로 하게 될 것"이라 전달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무료 공연도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라는 게 워너 측의 설명. 남가영 워너뮤직코리아 과장은 "부산에서 강연 행사 겸 왔다가 갑작스레 서울 무료 공연이 결정됐다"며 존스의 즉흥성에 혀를 내둘렀다.
 
이들이 펼친 광대한 음악 지도는 결국 세상의 온갖 '선'을 허무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관객 역시 연령의 장벽이 없었다. 50대 후반의 부부부터 젊은 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존스의 공연을 감상했다. 공연 직후 20대 소녀들은 줄을 서서 LP를 들이밀며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두 사람이 즉흥 연주를 할 때면 당신은 대륙을 넘어서는 모험의 여정길에 오를 것이다. ' 이들의 공식 홈페이지에 쓰여진 또 다른 문구다. 은밀한 느낌의 좁은 공연장을 나오면서 존스가 그린 광대한 음악 지도를 다시금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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