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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멜랑콜리 미학으로 그려낸 사랑, 오드리 노
제이슨 므라즈 썼다는 악기 제작사, 일주 한 번 이들 합주실로
조니 캐시 고향서 온 보컬 제이 마리…“도회적인 서울이 좋아요”
2020-04-09 00:00:00 2020-04-09 00: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밴드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밴드 오드리 노 멤버들. 왼쪽부터 하양수(기타, 프로듀서), 김명환(키보드), 제이 마리(보컬, 기타).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휘게(hygge)’.
 
설탕이 뚝뚝 떨어지는 꽈배기 한 뭉치를 베어 물며 이 단어를 떠올렸다. 따스한 노란 조명이 네 평 남짓한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휘게란 가족이나 친구들을 초대해 소소한 행복을 나누는 북유럽의 문화 양식. 추운 계절의 그들 나라에서는 주로 모닥불에 둘러 앉아 달콤한 초콜릿을 나누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이 따스한 공간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2일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인근 밴드 오드리 노[하양수(기타), 김명환(건반), 제이 마리(보컬), 박영신(베이스), 손경호(드럼)]의 합주실. 꽈배기 앞에 둘러앉은 이 다섯 음악가들은 잿빛 도시를 밀어내는 빛처럼 포근했다.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물어가는 안온한 삶의 대화. 벽면 포스터 사진 속 제이슨 므라즈가 평온한 시선으로 이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세계적인 기타, 이펙터 제조사 '물론'의 본사는 일주일에 한번 밴드 오드리노의 합주실로 변한다. 사진/밴드 오드리 노
 
밴드가 주 1회 모이는 이 아늑한 공간은 세계적인 기타, 이펙터를 생산하는 곳이다. 펜더, 깁슨과 겨루는 순수 국산 브랜드 ‘물론(Moollon)’의 본사. 제이슨 므라즈, 본 조비의 리치 샘보라 같은 뮤지션들이 애용한다는 이 회사 제품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명성이 대단하다.
 
이 곳에서 제품을 직접 만드는 박영준 ‘물론’ 대표는 90년대 전인권 밴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인물. 최근 그는 이 공간을 뮤지션들을 위한 합주실로 흔쾌히 내어주고 있다. 여기에 ‘음악 둥지’를 튼 오드리 노 멤버들은 “영세한 뮤지션들에게는 축복 같은 곳”이라며 “60년대 빈티지 사운드를 내는 물론 만의 소리 질감은 우리 밴드의 색깔과도 잘 맞는다” 더니 웃었다.
 
왼쪽부터 제이 마리(보컬)과 박영신(베이스), 손경호(드럼).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2018년 제이와 양수를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는 탄생 비화부터 영화 같다. 팀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제이는 미국 남부 아칸소주 출신이다. 컨트리와 포크, 로큰롤을 넘나들던 조니 캐시의 탄생지. 세계적인 컨트리 음악의 산실. 그러나 어린 제이의 눈에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지독하게 지겨웠죠. 시골 풍경, 매일 들리는 컨트리 음악….” 2014년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유학생 친구를 따라 한국에 왔다. 그의 파란 눈에 비친 서울의 도회적 풍경은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한국이 좋은 점? 24시간 내내 환한 거리요. 아! 거리에 총이 없다는 것도. 하하.”
 
유치원 영어교사 일을 하던 중 양수를 만나 우연히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양수는 2002년 ‘떳다 그녀’로 홍대에 펑크 록 바람을 일으킨 위치스의 멤버. 그는 “음악을 전혀 모른다”는 제이에게 비트 몇 개를 주고 노래와 랩, 멜로디를 붙이도록 했다. 함께 팀 단위로 작업하는 이상 각자의 의견, 감정의 색깔을 고루 담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저는 대중음악이란 결국 자기표현이라 생각해요. 제이가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부른 노래, 직접 쓴 멜로디가 좋게 느껴졌어요. 어떤 이야기를 음악으로 하고 싶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어요.”(양수)
 
밴드 오드리 노 기타리스트 겸 프로듀서 하양수.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제이가 쓴 멜로디에 살을 붙여가며 지금의 진영이 갖춰졌다. 원더버드 출신 드러머 손경호를 필두로 실력파 뮤지션들이 힘을 보탰다. 베이스 박영신은 어반 자카파, 이적, 김종서 등의 앨범 세션으로 활동한 연주자다. 키보디스트 김명환은 솔로 아티스트로 영화음악, 뉴에이지 연주곡을 발표해오고 있다.
 
이 다섯 멤버가 합쳐 내는 음악은 멜랑콜리 미학이 넘실거린다. 사랑과 우정을 그린 가사는 우울기를 머금은 소리 풍경에 젖어 나른하되 아름답게 들린다. 보컬 제이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사운드는 젊은 시절의 캐스 블룸이 부른 영화 ‘비포선라이즈’ OST가 떠오를 정도로 아련하다. 섬세하고 여리한 보컬이 밴드의 큰 중심을 잡는 부분에선, 장르는 다르지만 스코틀랜드 신스팝 밴드 처치스도 떠오른다.
 
“처음부터 ‘밴드를 해야지’ 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처치스 같은 단계까지 나아가야한다고 보고 있어요. 그런 (80년대 신스팝 향수를 재해석한) 음악들도 충분히 제이와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양수)
 
밴드 명 오드리 노(Audrey No)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신원불명의 홍길동씨’ 정도. 오드리는 미국에서 제인과 함께 쓰이는 가장 흔한 여성 이름이고, ‘No’는 ‘노바디(Nobody)’의 줄임말이다.
 
“특정한 무언가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앞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제이)
 
보컬 제이 마리.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최근 홍대 인근에서는 제이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팬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2018년 봄여름가을겨울 30주년 트리뷰트 앨범에서 밴드 혁오(오혁, 이인우)와 공동 작업을 한 후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지난해 말 발표한 밴드의 ‘Paper Airplane’ 뮤직비디오는 4개월 만에 유튜브 조회수 4000회를 돌파했다.
 
외로울 수 있는 ‘서울 살이’이지만 제이는 “멤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다”고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한 번은 눈병에 걸렸는데 멤버들이 나서서 도와줬어요. 음악도 저 혼자였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예요.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멤버들을 만난 게.”
 
밴드 오드리 노.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경호(드럼), 하양수(기타), 김명환(건반), 제이 마리(보컬), 박영신(베이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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