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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금융)벤처투자 11조…"여전히 '관' 중심"
공공기관 정책금융, 현장과 괴리감 줄여야
벤처, '매출 기입'·'비전문가 평가' 문제로 지적
VC, '투자분야'·'관리보수기준'·'회계기준'에 부담
2024-04-16 06:00:00 2024-04-16 06:00:00
[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벤처·스타트업 업계의 투자 혹한기가 장기화하면서 정책금융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당장 자금이 없으면 사업을 이어나갈 수 없는 벤처·스타트업은 정부의 정책 자금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수많은 기업들이 정책금융에 문을 두드리지만, 문턱은 여전히 높습니다. 특히 정책금융의 신청과 집행 과정 전반에서 수요자 입장이 충분히 배려되지 않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민간 벤처투자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를 비롯한 범부처 벤처투자실적은 11조8870억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전체 펀드 결성 금액은 12조9769억원이었습니다. 투자실적과 펀드 결성액 모두 전년 대비 각각 12.7%, 27.6% 빠지면서 많은 벤처·스타트업들은 자금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럴 때일수록 정책금융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생태계 구성원들의 고충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의 경우 정책금융과 벤처·스타트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대규모 자금이 정책금융 기관을 통해 벤처·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로 흘러가는 구조인 만큼, 각 기관에서 자금을 시의적절하게 적재적소에 원활히 공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선 정책자금 선정 및 집행 과정 중 고질적인 문제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기업은행,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의 자금을 이용한 적이 있거나 자금 신청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는 벤처·스타트업 대표들에게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해 물었습니다.
 
매출·영업익·수출액 요구에 초기기업 부담감
 
매출이 적거나 없는 초기 기업의 경우 서류작성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신보, 기보 등의 정책금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사업계획서에는 손익계산서를 기입해야 합니다. 매출액, 매출원가, 영업이익, 수출액, 수주액, 주요 거래처 등까지 작성해야 하는데요. 기술 기반 사업, 플랫폼 기업 등 당장 매출을 내기가 어려운 사업의 경우 해당 항목을 공란으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 플랫폼 스타트업 대표는 "창업한 지 1년만 지나도 성적표 보듯이 하는데 업력이 길어질수록 재무제표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다. 만약 3년 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다면 게임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며 "스타트업에 관련된 상품이라면 조금 더 미래가치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정책금융에서도 기존 매출 등 기존 성과를 더 중요시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신기술 평가 적임자 부족
 
심사과정에서 나타나는 평가의 전문성 문제도 있습니다.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해당 전문가가 심사를 맡아야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자율주행 관련 스타트업 대표는 "기보에서 기술 실사평가를 받았는데 심사위원들이 신기술을 잘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였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평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동종업계에 있어 신기술을 잘 아는 이들이 평가를 한다면 정확한 기술 평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기술 기반 스타트업들은 심사에 자사의 명운이 달린 만큼, 제대로 된 평가자가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투자 분야 지정·투자 촉진책…독이 될 수도
 
정책금융의 수요자들은 벤처·스타트업뿐만이 아닙니다. 정부로부터 출자를 받아 자금을 집행하는 액셀러레이터(AC), VC들도 정책금융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는데요. 특히 한국벤처투자는 벤처투자 자금을 시장에 공급하는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VC들은 한국벤처투자의 모태펀드를 바탕으로 펀드를 결성하게 되는데요. 한국벤처투자의 출자사업 공지를 보면 출자 분야별로 출자 계획이 정해져 있습니다. 올해 2월과 3월 공지된 출자사업 계획 공고를 보면 출자 분야가 라이콘(기업가형 소상공인), 메타버스, 스포츠산업, 스포츠 프로젝트, 관광기업육성, IP직접투자,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사이버보안 등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벤처투자는 부처별 요구에 맞게 출자 분야를 정했고 특정 전문성을 지닌 VC들이 그에 맞는 사업에 지원하면 된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VC들은 이런 구체적인 출자분야 설정이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금난이 지속되면서 VC들은 모태펀드 의존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금이 귀하다보니 전문 영역이 아닌 출자사업에도 손을 내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펀드 결성을 위해서 마구잡이식으로 출자사업에 참여하다보니 엉뚱한 곳에 투자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요. 한 VC 대표는 "최근 2~3년 사이 잘 모르는 영역에 출자하는 VC들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투자분야 지정은 오래된 관행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자유도가 필요한 VC 입장에서는 걸림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투자의 속도를 우선시하는 정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벤처·스타트업 생태계에 돈줄이 말라가자 정부는 빠른 투자를 독려하기 위해 '관리보수'를 인센티브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지난 2022년과 2023년 중기부는 펀드 약정총액의 1%를 관리보수로 지급하고, 투자집행에 따른 투자잔액의 2.5%를 추가 관리보수로 지급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한 루키 VC 대표는 "관리보수 룰이 달라지면서 투자 집행을 해야만 관리보수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됐다"며 "중기부에서 투자를 촉진하려고 변화를 준 것이었지만 VC 입장에서는 경기가 안 좋아서 투자할 곳도 많지 않은데 관리보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격이 됐다. 올해는 정상화가 됐지만 현금 여유가 없는 VC들은 투자 촉진 정책 때문에 힘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VC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올해부터는 다시 결성총액의 2%를 관리보수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회계기준 강화·펀드 심사과정도 도마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회계기준 강화도 VC들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벤처·스타트업이 상장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K-GAAP(일반기업회계기준)로 작성되던 재무제표를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로 전환해야 하는데요. 국내 모든 상장사는 금감원이 지정한 회계법인에서 지정감사를 받기 위해 K-IFRS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K-IFRS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외부 투자금을 많이 받은 벤처·스타트업들은 자본잠식이 일어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벤처투자의 대표적인 유형 중 하나인 상환전환우선주(RCPS)가 부채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VC들의 관리보수와도 직결됩니다. 투자한 기업이 자본잠식을 겪으면 VC들의 관리보수가 삭감됩니다. 자본잠식을 겪는 기업의 경우 더 이상 관리가 필요 없다고 보고 관리보수를 지급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이에 대해 VC들이 개선을 요구하자 중기부에서는 모태펀드 자펀드 관리보수 산정 기준인 '손상차손 가이드라인'을 5년 만에 전면 개정하고 상장 과정에서 회계기준 변경으로 기업이 일시적으로 자본잠식에 머무르게 된 경우 관리보수를 삭감하지 않도록 예외사유를 규정하고 나섰습니다. 자본잠식이 된 기업이라 하더라도 유의미한 후속투자를 유치한 경우 관리보수를 회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규정이 완화되긴 했지만 VC들은 후속투자가 없더라도 회계기준으로 인한 자본잠식을 겪은 경우 관리보수를 유지해 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펀드의 출자 주체와 심사 주체 사이 간극도 문제로 제기됩니다. 한 AC 대표는 "특허청에서는 매년 300억~500억원 규모로 펀드를 출자하고 펀드 출자 과정에서 심사를 한국벤처투자에 일임하고 있지만, 특허청에서 원하는 펀드 투자 방향이 실제 심사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며 "예를 들어 변리사가 운용역으로 참여하는 경우 가산점 1점을 주기로 돼있지만 선정 결과를 보면 이 정도의 가산점은 별다른 효력이 없는 것 같다. 기타 펀드와 차별점이 없이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가 본래 의도한 정책 방향과는 동떨어진 채 펀드가 운영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중기IT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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