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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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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짓가랑이

2024-04-12 19:47

조회수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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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에세이 수업에서 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일기쓰기는 제게 칫솔질 같은 일상이었기에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글쓰기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이 오자 글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답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글을 쓰고 싶어서 일기를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처음으로 제가 일기를 쓰는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동안 일기를 쓴다고 하면 '대단하다' 정도의 반응만 있었고, '왜'라는 질문은 없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유를 찾기 시작하다가 기대하지 않은 처절한 답변을 얻게 됐습니다. 일기쓰기에는 '시간'을 대하는 제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기억을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어른을 미루고 싶을 정도로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훌쩍 와버리는 내일이 싫었고 매몰차게 뒤돌아 가버리는 오늘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즐거웠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기쁨이 쌓이는 것인데 저는 왜인지 당장의 시간을 붙들고 싶어 안달을 냈습니다. 시험 전날,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애가 타는 것처럼 전 평생을 시간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살아왔습니다. 그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어 저는 매일 늦은 밤, 작은 일기장에 시간을 눌러 담았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행복에는 행복을 잃기 싫은 공포가 동반됐습니다. 전교 1등을 하고 세상을 저버린 이에 대한 뉴스를 보며 공감을 했던 저는,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실애공포처럼 제게는 '실복공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영향이 컸는지는 몰라도 언니, 오빠들의 학업 스트레스, 어른들의 고민 같은 것들이 꼬마인 제게 확성기를 댄 것처럼 크게 다가왔습니다. 초등학생이 수학능력시험을 걱정하고, 고등학생이 취업카페에 가입을 하고, 대학교 신입생이 취업스터디에 합류한 것을 보면 저도 참 어지간했습니다.
 
물론 일기에 쓰인 개선과 다짐이 제 삶에 큰 나침반 역할을 했던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시간에 대한 불안이 얼마간 깔려있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어릴 때 했던 생각은 결국엔 맞았습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자라는 건 고통을 수반했고, 어른이 된 일상은 예전만큼 단순하고 경쾌하지 않았습니다. '심심하다'는 말은 제게 사장된 지 꽤 오래됐습니다. 어른이 된 후 전 늘 할 일이 태산이었고, 시간을 허비할 때도 할 일이 밀려있었기에 제게 심심하다 라는 단어는 통할 리 없었습니다. 매일 마감하는 삶을 살면서, 나이 듦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예전보다 더 시간을 구걸하게 됐습니다. 더군다나 부모님의 노화를 보며 제게 시간은 애끓는 존재가 됐습니다.
 
요즘은 오늘 더 많은 것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내일 더 나은 제가 될 자신이 없는 저에 대한 불만의 화살이 시간을 향합니다. 남들은 시간이 잘 가는 제가 부럽다지만 정작 저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그들의 여유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애꿎은 시간만 탓하다 문득, 평생을 이렇게 살았지만 평생을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붙들어도 어차피 흐를 시간이라면 흐르는 대로 놓아주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언제까지 시간에 끌려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도 저는 일기에 오늘의 시간을 가둘 테지만, 시간에 쿨해지는 연습을 이제부터라도 해보려 합니다. 여태까지 구질구질했으면 됐잖아요.
 
  • 변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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