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창욱 기자] 중국산 저가 공세와 글로벌 수요 둔화로 국내 철강·석유화학 산업이 벼랑 끝 위기에 몰리고 있습니다. 지금껏 ‘산업의 쌀’로 불리며 한국 수출의 근간을 떠받쳐온 철강·석유화학 산업이 이제는 한계사업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하면서, 업계에선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스페셜티 전환과 구조조정을 뒷받침할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대선 후보들도 관련 공약을 내놓고 있지만 구체성과 실행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벼랑 끝에 놓인 철강·석화업계를 살리기 위한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책이 긴요한 시점입니다.
21대 대선에 출마한 주요 후보들의 철강·석화산업 주요 정책.(그래픽=뉴스토마토)
26일 <뉴스토마토>가 21대 대선 후보들의 철강·석화업계 관련 공약을 점검한 결과, 세 후보 모두 업계의 위기 상황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지원 방안은 세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업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 산업에 비해 투자 계획이나 실행 가능한 청사진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철강·석화, 끝모를 실적 하락
현재 철강·석화업계 실적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습니다. 포스코의 1분기 영업이익은 1.7% 감소한 568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당기순이익은 3440억원으로 44.3% 줄었습니다. 현대제철은 올해 1분기 영업손실은 190억원, 당기순손실은 544억원을 기록했습니다. LG화학 석유화학 부문의 경우 올해 1분기 영업손실 560억원으로 적자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롯데케미칼도 1분기 영업손실 1266억원으로 6분기째 흑자 전환에 실패했습니다.
이에 업계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전환과 사업 구조 리밸런싱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실제로 철강 및 석유화학 업계는 이미 자체적으로 구조 전환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포스코는 차세대 컬러강판 등 고부가 신제품 개발을 강화하기 위해 2023년 612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했습니다. 이는 2022년(5789억원) 대비 5.7% 증가한 수치입니다. LG화학 또한 초고중합도 PVC 등 스페셜티 소재 분야 강화를 위해 기존 제품개발팀 외에도 고부가 용도개발팀·고부가 시장개척팀 등을 신설하여 조직 차원의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중국산 저가 공세를 이기기는 힘들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의 철강·석화기업과 나 홀로 맞서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중국은 정부 주도하에 에틸렌 생산 능력을 2019년 2711만톤(t)에서 2023년 5174t으로 4년 만에 2배로 늘렸습니다. 한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경쟁자인 중국 기업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면서 “한국 기업은 사실상 중국 정부와 싸우고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기업 자체 역량만으로는 구조적 위기를 돌파하기 어렵다”며 “정부가 나서 업황 극복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와 정책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경북 포항에 위치한 포스코 제철소. (사진=포스코그룹 제공)
이재명 "고부가가치 R&D 지원"
철강·석화업계의 잇따른 실적 부진 속에, 주요 대선 후보들 역시 업계의 위기감을 인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번 21대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등 주요 대선 후보들은 공식 선거 일정이 시작되자마자 철강·석화 기업이 밀집한 포항, 울산, 광양, 여수 등 주요 산업 도시를 잇따라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포항을 산업위기 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하고, 해당 지역에 수소·철강·신소재 특화지구 조성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한 철강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위한 녹색 철강 정책 과제를 제안하고, 여수국가산업단지에 대해선 정부 주도의 구조개편과 고부가가치 연구개발(R&D)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또 여수산단을 중심으로 전남 동부권에 친환경 스페셜티 화학산업 거점을 육성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문수 후보도 포항을 산업위기극복 특별 대응지역으로 지정하고, 철강산업지원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석유화학산업 탄소중립 및 스페셜티 산업 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전남 동부권에 새로운 석유화학산업단지를 조성해 청정에너지 석유산업 기자재 생산 기지를 구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위해 규제 완화와 일자리 대거 창출 등을 내걸었습니다.
이준석 후보는 업종별 구체적인 접근보다는, 전통 제조업 전반의 활력을 복원하기 위한 포괄적인 산업 정책을 제시했습니다. ‘리쇼어링 특례 도입’을 내걸고, 기업의 지방 이전 유도와 외국기업 국내 복귀를 촉진하겠다는 겁니다. 또한 외국인 인력에 대한 임금 유연화와 법인세 자치권 확대 등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남 여수에 위치한 LG화학 여수공장.(사진=LG화학 제공)
김문수 "스페셜티 전환 프로젝트"
하지만 전문가들은 세 후보가 내놓은 관련 공약이 대부분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업계가 실제로 요구하는 구체적이고 과감한 지원 방안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 후보 모두 구체적 투자 비용, 재원 조달 방법, 산업 육성 플랜 등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철강·석화 산업은 한국 수출을 떠받쳐 온 핵심 산업이었지만, 지난 20대 대선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전향적인 투자 계획이나 명확한 로드맵이 없어, 또 한번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모양새입니다. 실제로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이재명 당시 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는 제조업의 핵심 가치를 ‘디지털 전환’과 ‘첨단화’에 뒀습니다. 산업 전반이 위기에 직면한 현 상황에서도 이번 대선의 정책적 관심은 AI, 방산 등 이른바 ‘미래 산업’에 집중되는 모습입니다. AI·반도체·방위산업 등에는 관련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철강·석유화학 산업을 살리기 위한 전향적인 재정 투입이나 구조 전환 지원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민동준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는 “세 후보 모두 철강·석화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아쉽다”며 “이들의 공약은 원론적인 지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산업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전향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철강·석화는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며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왔다”며 “이 산업들이 고부가가치형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국가 산업정책 차원’에서 깊이 있는 전략과 투자계획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끝>
박창욱 기자 pbtkd@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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