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근윤·신유미 기자] "사랑이 혐오와 반대, 그 모든 것을 이긴다는 말이에요."
13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제27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 한 레즈비언 커플이 자랑하듯 무지갯빛 휴대폰 케이스를 들어 보였습니다. 거기엔 'Love Conquers All(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서로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는 이들의 얼굴에선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에 대한 짜증도, 퀴어퍼레이드 건너편에서 진행된 반동성애 집회에 대한 분노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커플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행위를 통해 성소수자로서 그들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드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남대문로와 종로구 우정국로 일대에선 세상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결국 이긴다"는 믿음 하나로 뭉친 5만명(주최 측 추산)의 인파가 거리를 빼곡히 채웠습니다.
올해 퀴어퍼레이드의 슬로건은 '교집합: 다름을 연결로'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억지로 없애거나 애써 같아지자고 강요하는 대신 각자의 차이를 그대로 간직한 채 삶이 겹치는 지점을 찾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3일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한 레즈비언 커플이 자신들의 휴대폰 케이스를 자랑하듯 들어 보이고 있다. 휴대폰 케이스엔 'Love Conquers All(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인권위·질병청·불교계·청소년 등 행사장 채운 70개 부스들
슬로건의 취지에 걸맞게 행사장엔 각계각층의 다양한 뜻을 담은 70여개 부스가 들어서 퀴어퍼레이드에 활기를 더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건 국가인권위 직원들로 구성된 '앨라이(Ally·성소수자를 지지하는 협력자) 모임' 부스였습니다. '인권에는 뒤로 가기가 없다' 스티커를 신나게 나눠 주던 인권위 관계자는 "국가기관으로서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연대하는 인권위의 역할을 하기 위해 현장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인권위는 2017년부터 매년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공식 부스를 운영해 왔으나, 2024년 9월 안창호 위원장 취임 이후 공식 부스 운영이 중단됐습니다. 기독교인인 안 위원장은 공개 석상에서도 혐오 발언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진 걸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앨라이 모임을 꾸려 공식 부스의 빈자리를 대신해 왔습니다.
질병관리청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이즈 예방 홍보 퀴즈 부스를 운영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유정희 질병관리청 에이즈관리과장은 "HIV·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다 내놓고 하기 어려운데, 이런 기회를 빌려 퀴즈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13일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부스에서 참가자들에게 오색실을 나눠 준 이후 행진에 참여한 효록 스님. (사진=뉴스토마토)
불교계도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효록 스님(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은 참가자들의 손목에 다섯 개 색깔이 들어간 '오색실'을 매어주며 평온을 기원했습니다. 스님은 "성적 지향이나 성적 정체성 때문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원래 불교에서 오색은 적색, 청색, 황색, 백색, 흑색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날 불교계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 색깔에 맞춘 듯 적색, 청색, 황색, 백색, 녹색으로 된 특별한 오색실을 나눠 주면서 깊은 연대의 뜻을 표했습니다.
행사장 한편엔 청소년 성소수자 모임 '빛나는 우리'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올해 1월 온라인 채팅방에서 출발한 이 단체의 회원은 30여명으로, 탈가정 청소년 상담·지원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올해 처음 부스를 냈다는 서영 빛나는 우리 대표는 "청소년 권리는 많이 외쳐지는데, 청소년 성소수자의 권리는 생각보다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걸 공감하는 친구들이 모였다"고 말했습니다.
13일 서울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을지로입구역에서 종각역을 지나 행진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커플·반려견과 함께한 다양한 삶들…"사람 사는 게 똑같다"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도 면면이 다양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왔다는 20대 여성 조이(가명)씨는 행사에 참가한 이유에 관해 "최근 온라인 공간에선 차별과 혐오가 주류 정서처럼 소비되곤 한다"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렇게 직접 현장에서 마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같은 날 인근에서 열린 반동성애 집회에 대해선 "전통적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격동하는 시대인 것 같은데, (반동성애 집회 측 사람들도) 한번 이렇게 오셔서 퀴어퍼레이드를 봤으면 좋겠다"며 "사실 별로 다를 게 없고 그냥 사람 사는 게 똑같다. 경험을 안 해보셔서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계신 게 아닐까 싶다"고 했습니다.
3년째 파트너와 함께 퀴어퍼레이드를 찾고 있다는 홍석현(30)·이시은(29)씨는 올해 입양한 유기견 '무무(2살)'를 반려동물 유모차에 태우고 행진에 동참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씨는 "반려견도 우리 가족의 일원이니 당연히 함께 행사를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고, 홍씨는 "교제하기 전부터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지지자(앨라이)로서 꼭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축제는 함께 즐기는 자리인 만큼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다"고 웃어 보였습니다.
지난 2017년부터 꾸준히 퀴어퍼레이드를 찾아왔다는 예린(27)씨는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을지로입구역 인근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들려오는 반동성애 집회의 찬송가 소리에 맞춰 신나게 흥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서울 한복판에 모이는 인파가 점점 많아지면서 광장이 더욱 트인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좋다. 나중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모두에게 온전히 열린 축제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습니다.
13일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예수 복장의 백모씨. (사진=뉴스토마토)
800m 건너편선 반동성애 집회…물리적 충돌 일어나지 않아
같은 시각, 퀴어퍼레이드 현장에서 불과 800m 떨어진 서울시의회 앞에선 기독교 단체 '거룩한방파제'의 주최로 반동성애 및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가 열렸습니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숭례문까지 행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철저한 차단벽 설치와 통제하에 양측의 동선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우려했던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퀴어퍼레이드에 반대한 건 아닙니다. 모태 신앙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한 백모(30대)씨는 예수 코스프레 복장으로 행진에 합류했습니다. 피켓의 앞면은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을, 뒷면은 인근 반동성애 집회 방향을 향하도록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 서울 한복판에 오셨다면 아마 혐오의 확성기 앞이 아니라 이곳 성소수자들 곁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이라며 "10년 만에 다시 퀴어퍼레이드를 찾았는데, 기독교인일 땐 성소수자를 향해 무례한 말들을 많이 했던 걸 뒤늦게 느꼈다. 잘못된 신앙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고 했습니다.
'드러냄'의 하루…"같이 모여 표현하니 안도감·소속감 느껴"
이날 무더위 속에서도 이어진 퀴어퍼레이드는 '드러냄' 그 자체였습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이날만큼은 거리 위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행진 대열에서 자주색 시밀러룩을 맞춰 입고 걷던 레즈비언 커플은 "이렇게 한데 모여 있으니 무척 안전하다는 느낌과 함께 깊은 소속감이 생긴다"며 "평소에는 정체성을 잘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인 만큼, 오늘만큼은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유근윤 기자 9nyoon@etomato.com
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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