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직에 '걔네들'은 없습니다
언어는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문화를 만든다
2026-07-16 17:08:03 2026-07-16 17:08:20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습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회의를 마치고 본부장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본부에 요청한 자료가 며칠째 오지 않던 참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걔네들은 도대체 왜 그런대요..." 말이 나오는 순간, 제가 먼저 멈칫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걔네들'이라고 부른 것이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 표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조직 안에서 오고 가는지 새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민간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조직 안에는 사석의 언어가 공적 공간으로 스며드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 선후배로 처음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같은 직장에서 함께 일하게 될 때, 그 시절의 언어가 회의실 안으로 그대로 따라 들어오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걔네들'이나 '애들' 같은 호칭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그 호칭이 생겨났을 때의 과거 관계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언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걔네들', '애들'. 조직 안에서 후배 구성원들을 가리킬 때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불리는 분들 중에는 이미 자녀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15년, 20년씩 해온 분들입니다. 그분들도 조직 밖에서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선배이며, 지역사회 안에서 한 역할을 맡고 있는 어른들입니다. 조직 내에 '걔네들'이라는 직책은 없습니다. '애들'이라는 직함도 없습니다. 팀원이, 과장이, 차장이, 부장이 있을 뿐입니다.
 
왜 이런 언어가 생겨나는 걸까요. 대부분은 신입사원을 처음 맞이하는 순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새내기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선배들은 자연스럽게, 때로는 무심코 어린아이를 다루듯 그들을 안내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언어가 만들어지고, '걔네들', '애들'이라는 호칭은 그렇게 굳어집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함께 5년, 10년, 15년을 일하며 관계는 분명히 달라졌음에도 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신입사원 시절에 멈춰 선 언어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완강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관계는 자랐지만 언어는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그날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그것을 알아챘습니다. 알아채기 전까지는 그 언어가 거기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한 가지를 더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걔네들'이라는 말에는 선배로서의 우월의식도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왔고, 내가 더 많이 알고, 내가 이끌어줬다는 의식. 그것이 언어 속에 조용히 깔려 있습니다. 관계의 성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단순한 무감각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선배라는 권위의 언어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오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 쪽입니다. 옛말에 칼에 맞은 상처보다 말에 맞은 상처가 크다고 했습니다. 칼에 베인 자리는 아물지만 말에 베인 자리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날 누구를 겨냥해 그 말을 던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였습니다. 벼려서 찌른 말보다 무심코 흘린 말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정치를 한다면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正名)'고 답했습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바르지 않고, 말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500년 전의 통찰이지만 조직 안의 호칭에도 그대로 닿습니다. 부르는 이름이 먼저 그 사람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을 관행적으로 '반장'이라 불러왔는데, 협력 기관에서는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을 '주임'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직원들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했던 것입니다. 협업 자리에서 그것은 작은 문턱이었습니다. 1:1 면담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호칭을 바꿨습니다. 이듬해에는 입사 12년에서 19년이 된 고연차 직원들이 여전히 관행처럼 '대리'로 불리고 있던 것을 '선임'으로 바꿨습니다. 예산은 한 푼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기가 눈에 띄게 올라갔습니다. 이름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그분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지가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반쪽입니다. 규정을 고치는 데는 결재 한 번이면 충분했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그건 서명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비폭력대화』를 쓴 마셜 로젠버그는 대화의 첫걸음이 관찰과 평가를 분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걔네들'은 관찰이 아니었습니다. 평가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은 이름이었는데 저는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공자는 이름이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습니다. 로젠버그는 꼬리표가 그 사람을 가린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짚고 있었습니다.
 
"걔네들은 도대체 왜 그런대요..."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합니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의 고백이었습니다. 비폭력대화는 네 걸음을 권합니다. 무엇을 보았는지(관찰),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느낌), 나에게 무엇이 필요했는지(욕구), 상대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지(부탁). 이 네 걸음을 그날의 제 문장에 대어보았습니다.
 
"○○본부 최 차장님께 어제까지 회신을 부탁드렸는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금 답답했습니다. 일정을 맞추려면 조율이 필요해서요. 혹시 진행 상황을 알고 계시면 알려주시겠어요?"
 
같은 상황이고 같은 사람입니다. 달라진 것은 네 걸음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 어디에도 '걔네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관찰에는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나누는 대화를 매번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못 합니다. 다만 그 네 걸음을 알고 나면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아주 짧은 틈이 하나 생깁니다. 나는 지금 본 것을 말하고 있나, 아니면 오래전에 내린 평가를 꺼내고 있나. 어쩌면 그 틈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직의 언어도 그 틈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동료를 부르는 말이 그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 말이 쌓여 관계의 온도가 되고, 그 온도가 모여 조직의 문화가 됩니다.
나는 지금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어떤 언어로 부르고 있을까요.
 
김주성 노원구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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