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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유럽 그린벨트에서 야만의 우상 DMZ를 본다
2018-10-18 07:00:00 2018-10-18 07:00:00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1989년 이전 유럽 동서 냉전의 유산이었던 '철의 장막'이 '유럽 그린벨트'로 거듭나고 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북쪽의 발트해부터 남쪽의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중국 만리장성의 두 배쯤 되는 1만2500㎞에 걸쳐 있다. 유럽 24개국 관계자들은 독일 튀링겐주 아이제나흐시에서 이달 15일부터 19일까지 제10차 유럽 그린벨트대회를 연다. 이번 행사는 독일 중부의 튀링겐주 환경부가 행사비용을 후원하고 아이제나흐시가 장소와 시설을 제공했다. 주 환경부장관이 직접 발표와 토론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한국 국민신탁 관계자들과도 대담을 가졌다. 행사 장소인 아이제나흐시 바르트부르크성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마틴 루터가 교황의 감시를 피해 숨어 지내며 신약성서를 번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독일은 과거 동독과 서독 사이의 장벽을 독일 그린벨트로 복원하기 위해 2010년 자연환경보전법을 개정하고 '국가자연유산' 제도를 마련했다. 튀링겐주가 제일 열성적이다. 국가자연유산은 이름만 보면 흡사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제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천연기념물이 '점(點) 개념'이라면, 국가자연유산은 '면(面) 개념'이다. 세계자연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을 하나로 모아 국내판으로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에는 이미 여러 곳이 국가자연유산들로 지정됐다. 하지만 독일 연방환경부는 이 제도가 아직 완전히 정착된 게 아니고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면서 올해 말 쯤 중간평가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연방환경부 관계자들이 조심스러워하는 것과 달리 주 환경부는 제도 정착에 자신감을 보인다. 국립공원만으로는 그린벨트를 보호구역으로 만들기에 한계가 있어서다. 대회 중에 특별히 주목을 받았던 행사는 동독 출신의 마리오 골드슈타인이 선보였던 멀티비전 쇼 '죽음의 띠에서 생명선으로'였다. 그는 자유를 찾아 철의 장막을 넘었다가 두 차례나 투옥된 이력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었다. 쇼는 철의 장막 저편에서 고초를 겪다가 탈출하던 사람들과의 인터뷰까지 곁들여,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더했다.

유럽 그린벨트대회와 멀티비전 쇼를 통해 나타난 오늘날의 그린벨트를 보고 있자면 "저런 하찮은 인위적인 장막 뒤에 엄청난 동서 냉전이 도사렸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넘기 위해 목숨을 걸었나 보다"는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허물어진 후에는 '그저 그런 것'이 허물어지기 이전에는 그렇게 맹위를 떨쳤나 보다. 냉전시대의 정치가들과 군인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어쩌면 현세의 모든 인류가 철의 장막이라는 허상에 단단히 속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분명 과거 철의 장막은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처럼 오랜 세월 사람들의 왕래를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와 권리까지도 억압하였던 폭력의 우상이었다.
 
유럽 그린벨트의 잔영 위에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가 오버랩된다. 군사 정전협정(1953년) 당사국들은 "군사분계선에서의 무력충돌을 방지한다"면서 DMZ를 설치했지만, 이로 인해 남북 왕래가 끊어졌고 결과적으로 분단은 고착화됐다. DMZ는 평화를 내걸었지만 오히려 평화를 쫓아냈던 야만의 우상이 됐다. 빅 브라더들은 그 뒤에서 자기들만의 셈법에 따라 남과 북의 사람들을 이용했다. 남북 교류협력 또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지나온 과정을 재해석한다면, DMZ는 남북이 필요로 했던 게 아니라 이를 설정했던 열강들의 필요였을 뿐이다. 식민지도 아닌 독립국가에서 국제연합(UN)과 강대국들의 허락 없이는 DMZ를 넘을 수도 없었고 그 주변의 지속가능한 발전도 도모할 수 없다면, DMZ는 '원형이정'의 섭리에 따라 초극되어야 할 허상이다.

냉전시대 철의 장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유럽 그린벨트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DMZ도 어느 날 그렇게 갑자기 무너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최초의 폭력이 노예를 만들었고 그 노예의 비굴함이 폭력을 영속화시켰다"고 말했다. 야만과 미개의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지상 최후의 우상이 국제법의 보호 아래 한반도에 버젓이 버티고 있다.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유물이다. 아직 DMZ에는 어둠이 짙지만, 오늘의 유럽 그린벨트에서 DMZ의 내일을 본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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