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주 기자] 정부와 국회가 68개 법정기금의 개정 논의에 속도를 내면서 이를 통해 국가 재정 운용체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창업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술 기반 중소·벤처·스타트업을 새로운 사회의 주류, 이른바 '뉴 클래스(New Class)'로 육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국가 역할의 재정립과 법정기금 개정의 방향성에 대해 정재호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 소장의 견해를 들어봤습니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장. (사진=뉴스토마토)
다음은 정재호 소장과의 일문일답입니다.
기금법 개정으로 50조 '미래 투자'
-현재 법정기금 운용에서 개선해야 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법정기금은 명목상 기금마다 목적이 있고 예산이 정해져 있지만, 실제 운용은 부처와 기관마다 기준과 방식이 달라 중복 사업이 발생하고 투자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2024년 기준 68개 법정기금의 연간 운용 규모가 1000조원, 자산 규모는 3000조원에 달하지만, 정작 혁신 산업이나 신성장 분야에 투자되는 비율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첨단기술과 신성장 산업 등 미래 전략 영역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원을 투입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합니다. 따라서 기금법을 개정해 기금 간 조정과 통합을 추진하고, 여유자금을 혁신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금법 개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돼야 할까요?
기금별 운용 범위와 이익금, 여유자금 활용 규정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현재는 기금에 여유자금이 있어도 안전 예치나 채권에 주로 투자하는 보수적인 운용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전체 운용 규모가 1000조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이 중 5~10%만이라도 기술 기반 중벤스에 투자하도록 제도화한다면 50조~100조원이 혁신 분야로 유입될 수 있습니다. 이는 국내 벤처 생태계를 획기적으로 성장시키고 국가 경제 전반에 큰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정부에서 50조~100조원 후순위 투자를 하면 민간에서도 선순위로 그 이상의 투자가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글로벌 투자 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 경제영토는 무한정 넓어질 것입니다. 위풍당당한 선진국으로 도약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왜 지금이 정책금융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일까요?
현재 세계는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산업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국면에서 과거의 방식만으로는 절대 생존할 수 없습니다. 혁신 기술 분야에서 뒤처지면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재정·금융 정책 역시 '원점에서 다시 생각한다'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기술 실무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기금별 용처에 맞는 기술 기반 중벤스를 시행령에 담는다거나 또 '재정 운용의 효율적 재편'이라는 혁신 마인드도 한몫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법과 제도가 과거 산업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민간 기업이나 혁신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 또한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핵심 역할 중 하나가 바로 미래산업의 육성입니다. 민간투자만으로는 초기 위험도가 큰 혁신 분야에 충분한 자금이 흘러가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재정·금융 정책의 전략적 방향성을 제시해야 합니다.
기술 경쟁 시대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혁신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초기 단계 기업들은 성장 잠재력이 크지만 민간 금융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이때 보수적 운용 위주로 쌓여 있는 자금을 대담하게 돌려야 퀀텀 점프 수준의 성장 동력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정책금융이야말로 이런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정책금융 대전환으로 '뉴 클래스' 시대 열어야"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는 68개 법정기금의 중소·벤처·스타트업 투자 의무화를 위한 기금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사진은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 현장. (사진=뉴스토마토)
-법정기금 개정이 실현되면 우리 사회와 경제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기금법을 비롯한 전반적인 68개 법정기금의 개정이 이뤄지면 국가 재정의 효율성 개선과 더불어 창업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든든한 재원 확보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첨단기술 기반의 중벤스에 대규모 투자 자금이 흐르게 되면 일자리 창출, 신산업 생태계 성장, 글로벌 경쟁력 강화 등 다양한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기존 대기업 의존도도 낮아지면서 산업 구조도 다양화될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K-컬처, 웹툰, 화장품, 드라마, 음악 등 한류 산업은 기술 기반 중·벤·스가 한 것이지 재벌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중후장대한 반도체, IT, 자동차, 에너지 등 분야도 날고 기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혁신 벤처·스타트업이 차고 넘칩니다. 이들에게 자금을 넉넉히 공급해주면 다른 문제는 알아서들 잘 풀어갑니다.
기술 기반 중·벤·스가 점차 영향력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게 되면 한국의 경제·산업 구조는 보다 다양해지고 활력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를 '뉴 클래스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촉발된 벤처 붐을 보다 구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자는 취지이고, 이를 위해서는 법정기금 개정이 필수입니다.
-차기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다음 대통령 임기 5년이 지나면 '새로운 계급, 기술 기반 중·벤·스'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삼성, 현대, SK, LG 등 재벌의 피를 이어받은 기업들은 과거 정경유착, 관경일체 속에서 엄청난 특혜를 받으면서 커왔습니다. 이제는 기술 기반 중·벤·스가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한국 사회의 신(新)계급 뉴 클래스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할 때만이 '먹사니즘'을 위한 진정한 질적 경제성장도 이뤄집니다.
내 눈에는 재벌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과 은행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가처분 소득과 돈의 흐름이 반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벌어서 쌓아둔 재벌들의 1000조원이나 되는 사내 유보금을 투자 운운하면서 건들면 (그들에게 고용된) 곳곳에 박혀 있는 개 떼들이 나서서 성토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책금융 대전환이라는 관점에서 68개 법정기금의 개정이 핵심 과제가 돼야 합니다. 1000조원 규모의 기금을 혁신 스타트업과 벤처에 적극 투자한다면 창업국가로 도약하는 길이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정책을 넘어 한국 사회를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드는 시대적 과제이자 도전입니다.
오승주 기자 sj.o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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