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1. 라오스에서 매일 볼 수밖에 없는 까이쏜 폼위한
라오스에 있으면 까이쏜 폼위한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매일 보고 살 수밖에 없다. 라오스에서 통용되는 지폐에는 가치가 낮아 어쩌다 거스름돈으로 쓰는 500낍짜리를 빼고는 어김없이 까이쏜 폼위한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는 현 라오스 집권당인 인민혁명당 서기장으로 1955년 창당 때부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은 모든 것이다. 모든 결정을 당이 한다. 군대도 국군이 아니라 당군이다. 그는 1955년부터 1975년까지는 해방구를, 집권한 뒤에는 라오스 전체를 통치한 절대 권력자였다.
2. 비엣인 아버지, 라오인 어머니
까이쏜 폼위한은 1920년 12월13일 라오스 남부 싸완나켓주 나쎙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응우웬 찌 로안이란 비엣인으로 프랑스 식민당국에서 통역과 번역을 담당한 관리였다. 어머니 이름은 ‘낭독’으로 전통 요법으로 치료를 하는 의사이자 농민이었다. 아버지가 비엣인이었으므로 까이쏜은 응우웬이란 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유학을 위해 베트남으로 건너가 입학했을 때의 이름이 응우웬 찌 무였다.
라오스 10만낍 지폐. 까이쏜 폼위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진=우희철 작가)
인접한 나라가 사이좋은 경우가 드물듯이 라오인은 비엣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비엣인을 중간 관리자로 삼아 라오인을 통치했기 때문에, 비엣인은 지주와 소작 관계인 마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초기 라오스 민족주의는 종주국 프랑스에 대한 대항 감정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비엣인에 대한 반감에서 출발했다.
일본인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한국에서 당수가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까이쏜이 민족 감정을 넘어 정치적 입신이 가능했던 배경은 라오스의 강한 모계모권적 전통도 무시할 수 없다. 씨 다른 동기는 많아도 배 다른 동기는 드문 게 라오스 사회이다. 그럼에도 라오스 같은 전통사회에서 비엣인 혼혈이란 사실은 까이쏜에게 상당한 정치적 장애가 됐다. 이것은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까지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비엣인 외에 다른 국적 당원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까이쏜의 정치군사 활동이 호치민과 보 응우엔 지압 장군의 군사적 지도를 받는 게 분명했으므로 라오스 정적들은 그를 베트남의 꼭두각시라고 공격했다.
‘당은 까이쏜 품위한이 라오인 아내를 가져야 한단 결론을 내렸다. 당 지도자 2~3명이 이미 비엣인 아내를 뒀고, 적은 이에 대해 대중들에게 중상모략을 퍼뜨리고 있다.’ 까이쏜의 부인 통윈 까이쏜이 1990년 회고한 내용이다. 인용문에서 비엣인 아내를 둔 지도자들이란 초대 대통령이 된 쑤파누웡 왕자와 3대 대통령으로 인민혁명당 2인자로 인식되던 ‘누학’을 가리킨다. 누학은 베트남계로 비엣인과 재혼했다.
3. 까이쏜의 성장과 재능
1920년에 태어난 까이손은 7세에 마을에 있는 사찰 학교를 다녔고, 라오-프랑스 학교로 진학했다. 1935년 아버지의 나라 베트남 하노이로 건너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쑤파누웡은 왕실이란 배경이 있어 베트남과 프랑스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고, 까이쏜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비엣인이었기 때문에 유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1943년 까이쏜은 하노이 인도차이나대학교 법대에 들어갔고, 이때 평생 동지가 된 누학과 함께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까이쏜의 재능이자 무기는 선전 능력이었다. 그는 청중 수준에 맞게 쟁점을 설명하는 데 능숙했다. 라오스 소수 민족 크무족과 몽족 농민들에 대해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까이쏜은 인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직접 강사로 활동했다. 까이쏜의 이런 능력은 베트남에서 라오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창간한 ‘라오 야이’, 즉 '위대한 라오스'라는 신문을 만들면서 길러졌다.
4. 라오스의 권력은 굴에서 나왔다
1945년에 일제가 라오스를 점령하자 까이쏜은 라오스로 귀국했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초기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을 연결하는 담당자였고, 1945년 8월 고향 싸와나켓주 해방작전에 참여해 9월 봉기를 주도했다. 프랑스 재점령으로 라오스 독립이 무산되자 까이쏜은 라오스 동북부, 베트남과 인접한 후와판주에서 최초의 무장부대를 만들어 게릴라 활동 거점을 확보했다.
까이쏜은 1947부터 1949년까지 라오스 동북부에서 인민군을 창설하고, 1949년 1월20일 라오인민해방군으로 개편했다. 1949년 1월6일 인도차이나공산당에 입당을 신청했고, 1949년 7월28일 정당원으로 승인받았다. 까이쏜 입당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1951년 2월까지 2091명 당원 중 라오인은 고작 81명에 불과했다.
인도차이나공산당 2차 대회에서 국가별로 당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고 4년 뒤인 1955년 3월 22일, 라오인민혁명당 창당대회에서 까이쏜 폼위한은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됐고,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지명됐다. 당과 군 최고지도자였던 까이쏜은 현실의 통치자가 됐다. 베트남처럼 북위 17도 분단선이 없었을 뿐이지 라오스는 라오왕국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과 인민혁명당 해방구로 갈린 사실상 분단국이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미군이 호치민 트레일을 차단하려는 폭격은 유례없이 집요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58만번의 폭격과 200만톤에 달하는 폭발물이 라오스 땅에 쏟아졌다. 까이쏜은 오지 중의 오지 후와판주 쌈느아군 동굴에 혁명 사령부를 차려 무려 9년을 버티면서 해방구를 지켰다.
까이쏜 폼위한 박물관 진입로에 세워진 동상. (사진=우희철 작가)
5. 1975년 라오스 혁명
까이쏜은 미군이 철수한 1973년부터 시작된 혁명적 정세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와는 달리 3단계로 차근차근 혁명을 전개해 나갔다.
1단계: 대중적인 시위
1975년 5월 대중적 시위로 왕당파를 압박해 내각 구성원 5명을 사임시켰다. 왕당파 실력자 31명은 대중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태국으로 탈출했다.
2단계: 왕국군과 경찰에 대한 와해 공작
인민혁명당과 빠텟라오 공작에 의해 1975년 5월 왕국군과 경찰 내에서 힘의 역전이 일어나고, 결국 8월에 전복됐다.
3단계: 군주제 폐지
마지막 국왕 씨싸왕 왓타나는 1975년 11월26일 수족이 잘려 나가고 지지 세력이 도주하자 왕실 재산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퇴위를 선택했다.
캄보디아 공산당과 당군 크메르루주, ‘붉은 크메르’ 지도자 폴 포트는 다음과 같은 극언을 남겼다. ‘불완전한 인간보다 아무도 없는 것이 낫다.’ 까이쏜은 인구의 10%와 반체제 세력이 메콩강을 건너 탈출하는 것을 방치했다. ‘반혁명 세력’과의 불필요한 대결이 없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까이쏜은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도 직접 나서지 않는 비밀 지도 방식을 바로 버리지 않았다. 그가 국가의 공식 지도자인 대통령이 된 건 1991년,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도 15년을 넘긴 시점이었다. 그가 이런 인내와 지구력, 점진적 방식을 택한 건 출신의 약점, 혁명과정에서의 역할과 위치를 타산한 ‘심모원려’였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마저도 라오인 심성을 반영한 것이다.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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