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미국 백신 정책의 혼란…공중보건정책, 어디로 가나
근거 기반 사라진 위원회, 백신 신뢰 흔들어
2025-07-15 09:02:36 2025-07-15 09:02:36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에 있는 CDC 본부(사진=CDC)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미국의 백신 정책이 중대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과학과 증거에 기반해 수십 년간 공중보건의 근간을 이뤄왔던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예방접종 실무 자문위원회(ACIP)가 최근 급격한 구성 변화와 정책 전환을 맞으며, 전례 없는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25~26일 열린 ACIP 회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미국의 여러 과학 미디어에 따르면 위원회는 기존 백신 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인간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확대 여부 등에 대한 중요한 표결을 돌연 취소했습니다. 대신, 과학적으로 반박된 오래된 주장들, 예를 들면 백신과 자폐증의 연관성, B형 간염 백신의 필요성 등이 다시 논의 테이블에 올랐습니다.
 
공중보건 전문가들과 의료계는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ACIP 회의를 “과학과 증거, 공중보건이라는 오랜 초점을 크게 벗어난 자리”라며 보이콧을 선언했고, 독자적인 백신 접종 일정을 발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공중보건의 근간 흔드는 인사 교체
 
이번 사태의 시작은 지난 2025년 2월 13일 미국 보건복지부(HHS) 제26대 장관으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가 임명된 뒤 이루어진 전격적인 인사 조치였습니다. 그는 ACIP 위원 17명을 전원 해임하고, 그중 일부 자리를 반(反)백신 단체와 연관된 인사들로 채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위원회 구성원 중 과학적 전문성과 공중보건 경험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습니다. 이 파동에 대해 미국의사회(AMA) 회장 브루스 스콧(Bruce Scott) 박사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ACIP는 수십 년간 과학과 데이터에 기반한 백신 권고를 제공해 왔고, 이번 조치는 신뢰를 훼손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한 정책을 뒤흔드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은 대표적인 반백신 운동가로, 과거부터 과학기관과 공중보건 전문가를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관료집단”이라고 비판해 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ACIP 재편은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라, 트럼프 진영의 반전문가주의(anti-expertism)와 과학에 대한 정치적 통제 시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지니아주 ‘국가 백신 정보 센터’에서 활동 중인 빅키 페브스워스(Vicky Pebsworth), 자폐증과 백신을 연결짓는 논문을 발표한 린 레드우드(Lyn Redwood) 등 논란의 인물들이 주요 패널로 등장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백신 제조사를 상대로 법정 증언을 벌이며 경제적 이익을 취해온 전력도 드러났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수 페신(Sue Peschin) 노화연구연합 회장을 비롯한 의료계 인사들이 “위원회가 더 이상 과학적 객관성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기존 백신 정책을 뒤엎기 위한 구성임이 분명하다”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B형 간염 백신 재검토…출생 직후 접종 철회?
 
ACIP 회의에서는 특히 신생아 B형 간염 백신 접종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이 나와 의료계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위원장 마틴 쿨도르프(Martin Kulldorff)는 “감염된 어머니의 자녀에게만 접종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이는 곧 "수천 건의 모자 감염을 막아온 보편접종의 후퇴"라는 경고로 이어졌습니다. 차리 코헨(Chari Cohen) B형간염재단 회장은 “출생 시 접종은 공중보건의 최후 안전망이다. 이 접근 방식을 버리는 건 백신정책의 퇴보다”라며 반발했습니다.
 
백신과 자폐증이 연관돼 있다는 오랜 논쟁이 다시 재점화된 것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미 과학적으로 수십 차례 반박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티메로살-자폐증 연관설’이 공식 회의 석상에서 다시 거론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티메로살은 대부분의 백신에서 이미 제거되었고, 소량 남아 있는 경우도 주로 다회용 독감 백신 병에서 사용되고 있으므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 사실을 묵살한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새로 임명된 일부 위원은 이를 문제 삼으면서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전문가 집단의 독자 노선…백신 정책 이중화 우려
 
현재 미국의 주요 의료 및 과학 단체들은 ACIP 대신 별도의 전문가 자문기구 설립을 검토 중입니다. 미국 소아과학회는 이미 ACIP를 ‘불법적 위원회’로 규정하며 독자 노선을 밝힌 상태입니다. 감염질환학회, 노화연구연합 등도 향후 회의 불참 가능성을 열어둔 채 경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쓴 기고문에서 백신위원회 전원 교체 방침에 대해 “친백신/반백신 논쟁을 넘어 국민 신뢰 회복이 목적”이라며 “미국 국민은 보건당국이 편향 없는 과학에 기반해 권고한다는 신뢰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을 부정하고 있다”고 반발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단지 백신 정책만이 아니라, 향후 미국의 감염병 대응·약물 승인 체계·임상 시험 등 의학 전반에 걸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시작된 ACIP 회의가 오히려 과학의 신뢰를 흔든다는 비판을 받게 된 지금, 향후 미국 보건복지부나 CDC의 결정이 어디로 향할지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의료 정책의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백신 정보를 제공하는 CDC 홈페이지(사진=CDC 웹사이트 화면 캡처)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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