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를 중심으로 국내 제조업 경기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철강·석유화학·기계 등 한국 산업의 뿌리인 전통 제조업은, 글로벌 통상환경 악화와 내수 부진의 늪에 빠져 고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K-제조업의 ‘산업 양극화’가 극명해지는 가운데 경제 불균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잖습니다. 양극화는 단순한 경기 사이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체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대응이 요구됩니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불균형의 실체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기획을 세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 주) |
[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전은비 인턴기자] ‘1850억달러.’
올해 3분기 국내 기업들의 수출액으로 한화 약 270조원에 달하는 역대급 규모입니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가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한국 경제는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을 맞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숫자 이면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테헤란로를 따라 늘어선 서울 강남구의 고층 건물들. (사진=연합뉴스)
반도체로 대표되는 ‘자본재’와 자동차 등 ‘소비재’ 수출 활황이 전체 증가세를 이끌었습니다. 실제 전기·전자 분야 수출액(842억달러)은 반도체 호조에 힘입어 1년 전보다 15% 증가했으며 운송장비는 329억달러로 9.3% 뛰었습니다.
반면 화학제품, 석유정제 등을 포괄한 석유화학산업 수출액은 279억달러로 6.6% 감소했으며 목재종이(-7.7%)와 섬유의복(-5.1%), 도소매업(-3.2%) 분야 수출도 전년 동기 대비 쪼그라들었습니다. 같은 제조업에서도 쏠림 현상이 심화하면서 격차가 벌어지는 등 산업별 양극화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호황 vs 침체…기업별 온도차
전체 수출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상위 10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무역집중도) 또한 사상 처음으로 40%대로 올라섰습니다. 이는 2018년 3분기(39.4%) 이후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157억3000달러로 전체 수출의 26.4%를 차지했습니다. 지난 2010년까지 10%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반도체 의존도가 더 커진 모습입니다.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일부 기업에 대한 쏠림 현상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냅니다. 반도체 경기가 좋으면 경제가 부양되고, 나빠지면 전체 경제가 흔들리는 등 경제의 변동성이 높아지는 과정이 반복돼왔습니다.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구조에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철강, 석유화학, 기계 등 전통산업을 보면 심각성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의 경우 내수, 수출, 환경 규제라는 삼중고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상태입니다. 전체 수요의 45%를 차지하는 건설 부문이 침체되면서 내수 시장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5000만톤의 명목 소비량이 무너져내린 데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인상과 중국발 저가 공세 등 공급 과잉이 겹친 까닭입니다. 특히 올해 3분기에만 현대제철, 포스코, 동국제강 등 국내 철강 3사의 가동률이 79.9%로 악화한 가운데 미국의 철강 관세도 50%까지 치솟으며 수익성 위협 요인은 점증하고 있습니다.
석유화학산업도 암울합니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정부와 구조 재편 협약을 맺은 국내 주요 석화업체들의 올해 상반기 매출원가율은 평균 98.6%로 집계됐습니다. 매출원가율이란 기업 매출액 중 원가가 차지하는 비율로, 판매가 100원인 제품의 원가가 99원에 달했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10월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대전 SK하이닉스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관람을 하고 있다. (사진=백아란기자)
영업이익도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국내 10대 석유·화학기업의 3분기 연결 기준 실적을 보면 공시를 하지 않은 DL케미칼을 제외한 롯데케미칼(-1326억원), HD현대케미칼(-1031억·별도)·한화토탈에너지스(-992억원)·SK지오센트릭(-141억원)·한화솔루션(-74억원) 등 절반 이상의 기업이 영업 손실을 시현했습니다. 정제 마진 개선으로 적자 폭은 다소 줄었지만 불황의 그늘은 여전한 모양새입니다. 누적 기준으로 보면 에스오일(-1363억원)을 포함해 6곳에서 영업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삼성전자(12조1661억원)와 SK하이닉스(11조3834억원)가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 따른 메모리 수요 증가로 영업이익 10조원 클럽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슈퍼사이클에 올라 탄 것과 대비됩니다.
철강·석화, 가동률 줄고 수익성도 악화
양극화는 산업별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 그룹 내 계열사별로도 격차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삼성에서는 삼성SDI가 5931억원의 손실을 기록하며 적자 전환했고 삼성E&A와 삼성SDS가 각각 화공 부문 수주 부진, IT매출 감소 등의 영향으로 영업이익이 각각 13.4%, 8.1% 감소했습니다. SK그룹의 경우 SK아이이테크놀로지(-472억원), SKC(-528억원), SK바이오사이언스(-194억원) 등의 계열사 적자가 지속되고 있으며 LG에서는 LG생활건강(-56%)과 LG유플러스(-34%), LG전자(-8.4%)의 영업이익이 1년 전보다 떨어진 반면 LG디스플레이와 LG에너지솔루션은 흑자 전환했습니다.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제조업 경기가 반도체 등 정보통신기술(ICT) 중심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전통 제조업은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K-제조업의 체온이 한쪽만 뜨겁고 한쪽은 식어가는 구조적 불균형은 내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시장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10대 수출 주력 업종 기업 150개사를 상대로 ‘2026년 수출 전망 조사’를 진행한 결과, 내년 수출 증가율은 올해의 절반 아래인 0.9%로 급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수출 증가율일 2.2%라는 점을 고려하면 반토막 나는 셈인데 업종별로는 자동차(-3.5%), 철강(-2.3%), 석유제품(-1.3%) 업종의 수출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수출을 통해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익의 수준인 채산성 또한 응답 기업의 18%가 악화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올해와 비슷할 것으로 본 응답은 77.3%이며 개선 전망은 4.7%에 그쳤습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기업들의 최대 현안이었던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으나, 기업들은 여전히 통상 불확실성을 체감하는 상황”이라며 “정부는 통상 환경 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과 함께 세제 지원, 외환시장 안정 등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전은비 인턴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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