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공모함 강습단, 이지스 구축함, F-35 스텔스 전투기. 이름만 들어도 압도적인 첨단무기체계들이다. 억 단위의 달러가 입금된 천문학적 정밀 무기들이 집결한 미군의 기동 전력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국방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전략자산들이 수천 달러짜리 저가 자폭 드론과 조잡한 기뢰, 은밀하게 접근하는 고속정 앞에 맥을 못 추고 허우적거리는 기이한 공간이 있다. 바로 ‘해협(Strait)’이다.
해협은 지정학적 마술을 부린다. 수백억 달러의 첨단 전략자산을 일순간에 무력화하며, 세계 경제와 물류의 목덜미를 쥐고 흔든다. 중동의 운명을 가르는 호르무즈 해협과 예멘 반군이 국제 물류를 인질로 잡은 바브엘만데브 해협, 나아가 최근 유럽으로 향하는 밀입국과 안보 위기의 진원지가 된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기까지, 현대 국제정치의 가장 첨예한 균열은 예외 없이 이 좁은 바닷길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마술 같은 공간이 비단 현재의 분쟁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스포루스 해협, 말라카 해협, 그리고 동아시아의 시한폭탄인 대만 해협까지. 세계의 눈과 귀는 다음 폭발점으로 다시 해협을 주목하고 있다.
왜 해협인가? 해협은 물류의 병목지점(Chokepoint)이자, 강대국과 지역 세력 간의 치열한 이익이 정면충돌하는 지정학의 급소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뇌로 향하는 ‘경동맥’과 같다. 이 좁은 관 하나가 막히거나 자극을 받으면 뇌졸중이 일어나듯이 해협에서의 작은 마찰은 곧바로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와 에너지 위기, 나아가 세계적 대란으로 이어진다. 군사학적 관점에서 해협은 정량적인 무기 수량 비교나 스펙 싸움이 철저히 무의미해지는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의 완벽한 무대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이를 경험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십수 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 함대를 궤멸시킨 울돌목(명량해협) 역시 본질은 해협이었다. 좁고 거친 병목지점에서는 거대한 함대의 수적·기술적 우위보다 지형을 활용한 비대칭적 타격력이 판도를 바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맞서 연합군이 사투를 벌였던 넓은 대서양, 혹은 거대 항공모함들이 시야 밖에서 주력기를 주고받던 미드웨이 해전의 남태평양은 말 그대로 ‘대양(Blue Water)’의 전투였다. 그러나 현대전의 중심축은 이 개방된 대양에서 연안과 해협, 즉 ‘갈색 물(Brown Water)’의 영역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미군이 압도적인 국방비와 첨단무기를 쏟아붓고도 호르무즈 해협이나 홍해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둔중하고 거대한 최첨단 전략자산은 좁고 복잡한 연안에서 오히려 피격 위험에 노출된 거대한 표적으로 전락하기 쉽다. 반면, 작고 빠른 고속정과 기밀한 연안전투함, 은밀한 기뢰 기동력은 연안과 해협 전투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한다. 비대칭적 위협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거대한 항공모함이 아니라, 흙탕물 속에서 끈질기게 생존하며 적의 허점을 찌르는 실용적 연안 전력이다.
이란 전쟁으로 원유 수송의 20%를 차지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전 세계 주요 해협이 무역과 에너지 흐름을 좌우하는 구조가 부각됐다. (이미지=뉴시스)
이러한 현대전의 본질적 변화는 한국 해군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이라는 좁고 얕으며 수시로 위기가 고조되는 연안 환경에서, 30년 이상 북한의 비대칭 도발에 맞서 가혹한 실전적 대비를 해왔다. 기뢰를 탐지·제거하는 소해함, 서해의 파도를 가르며 연안을 수호해 온 참수리와 윤영하급 고속정, 그리고 얕은 바다에 특화된 연안 전투력은 한국 해군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독보적인 자산이다. 미군의 거대한 항모전단조차 쩔쩔매는 해협과 연안의 비대칭 환경에서, 실제로 판을 지배하고 유용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쪽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해군과 같은 연안 특화 전력이다. 이제는 ‘대양해군’이라는 환상을 담담히 내려놓아야 할 때다. 대양의 파도를 가르는 거대한 함대의 로망에 취해 해양 안보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곳은 푸른 대양(Blue Water)이 아닌, 치열하고 험난한 흙탕물(Brown Water)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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