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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미루지 않는 날’의 필요성
2019-04-02 06:00:00 2019-04-02 06:00:00
'세계 미루지 않는 날(La journee de la procrastination)'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너무나 생소한 날이어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미루지 않는 날’은 지난 3월25일 벌써 아홉 돌을 맞았다. 2010년 신생 출판사 아나베(Anabet)의 창립자 다비드 데껭빌(David d'Equainville)이 인간의 ‘질질 끄는 행동에 익숙해진 사회’를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창설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인의 미루는 습관을 조사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85%의 프랑스인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미루는 버릇이 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번 이상 해 본 적이 있는가. '아직 더 있어도 돼', '그거 나 마지막 순간에 할거야', '내일 의욕이 생기면 할거야.' 여기에 포함된다면 당신은 질질 끄는 경향이 있거나 내일에 구속을 받는 사람이다." 이러한 현상은 청년층(19-24세, 92%)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룰 경우 제일 희생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0%가 육체적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유시간에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루다가 그만 포기한다. 그 다음으로는 집안정리나 보수공사(51%)를 미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버릇 때문에 생기는 손실 중 하나는 건강을 해치는 것이다. 46%의 프랑스인은 병원에 가는 것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43%는 상품을 교체하거나 계약 등을 해지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36%는 직장을 바꾸거나 이사를 하는 것과 같은 무거운 결정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이런 버릇을 고치고 싶어 하지만 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단지 22% 만이 습관을 고치는데 성공했고, 43%는 실패했다. 특히 여성(69%)과 청년들(78%)이 이런 경향이 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활습관을 바꾸겠다고 다짐하고선 바로 다음날 원점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장 피에르 술리에(Jean Pierre Soulier)는 '질질 끄는 버릇(procrastination)'은 하나의 행동으로, 우리 생활의 특정 부분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가장 자주 미루는 일은 각종 공과금을 내는 행정적인 일이다. 이러한 경우 보통 시민들은 연체료를 물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14년 프랑스 대외무역 장관 토마 테브누(Thomas Thevenoud)의 경우가 그렇다. 테브누는 소득세를 내지 않고 미루다 적발돼 장관으로 임명된 지 9일 만에 사임했으며 형사처벌까지 받아야했다.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피선거권을 3년 간 박탈당했다. 테브누의 부인 상드라(Sandra) 역시 같은 형을 받았다. 판사는 고위공직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테브누 부부가 그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며 형을 언도했다.
 
소득세 납부를 미루다 결국 장관직에서 쫓겨나고 형까지 언도받은 테브누 이야기는 요즘 우리 청문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배우자는 2015년도 귀속분 종합소득세를 지난 2월26일에야 납부했다. 지난달 12일에는 종합소득세 2280여만원을 냈다. 테브누처럼 늑장을 부리다 이제야 낸 것인가(이에 대해 박 후보자와 중기부는 "배우자가 지난 2013년 일본 법무법인에서 받은 급여를 두고 착오가 있었다", "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아무튼 테브누의 사례와 견주어 본다면 박 후보자는 낙마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청와대는 다른 2명의 후보만 사퇴시키고 박 후보자에 대한 결정은 미루고 있다.
 
한국의 인사청문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 함구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지만 굳이 침묵을 깬 이유는 '세계 미루지 않는 날'에 프랑스 언론이 테브누 사건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측정하는 잣대가 프랑스와 너무나 다르다. 소득세를 신고·납부하지 않았다고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그것도 모자라 형까지 언도받은 테브누. 그는 결국 2017년 정계를 은퇴하고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이와는 달리 장관이 되고자 미루던 세금을 부랴부랴 내고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인. 우리 정치가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다시 ‘세계 미루지 않는 날’로 돌아와 결론을 내리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 인생을 망치지 말자. 세금을 안 내고 미루면 연체료를 내거나 탈루의혹을 받아야 하고, 치과에 가는 것을 질질 끌다 보면 충치 때문에 고생한다. 컴퓨터의 파일을 정리하지 않고 미루다 그만 과부하가 걸려 컴퓨터를 수리하거나 새로 교체해야 한다. 이런 불상사를 줄이기 위해 우리도 일 년 중 하루를 '미루지 않는 날'로 정해 그날만은 그날 할 일을 꼭 실천해 보자. 미루다 인생을 망쳤다는 후회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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