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논문들 때문에 신규 논문 접수를 중단한 <바이오엔지니어드(Bioengineered)> 표지.(사진=Bioengineered)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최근 세계적 출판사 테일러 앤 프랜시스(Taylor & Francis, 이하 T&F)는 자사가 발행하는 생명공학 분야 저널 <바이오엔지니어드(Bioengineered)>의 신규 논문 접수를 전면 중단한다고 선언했습니다. 1798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창업한 T&F는 매출액이 2023년 기준 한화로 8000억원, 영업이익이 2800억원에 이르는 대형 문예·학술 출판사입니다.
T&F의 이번 조치는 아주 이례적인 것으로 학술지 출판계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T&F가 자사가 발행하는 유력 학술지인 <바이오엔지니어드>의 논문 접수를 중단한 이유는 해당 저널에 게재된 약 1000편의 논문에서 조작 또는 흔히 ‘페이퍼 밀(paper mill)’이라고 하는 상업적 조직이 대필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T&F는 지난 7월 2일에 발표한 ‘출판사 공지’에서 이번 일시 중단은 “편집장, 편집위원회, 논문 대필 또는 조직적인 조작 활동의 산물로 의심되는 다수의 기존 논문들에 대한 조사에 전념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논문 제출 건수와 논문 제출 이후 저자 변경 요청의 급증은, 이 저널이 조직적인 페이퍼 밀의 표적이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과학의 진실성을 좀먹는 ‘페이퍼 밀’
‘페이퍼 밀’은 일종의 논문 생산 ‘공장’입니다. 의뢰인이 돈을 지불하면,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하게 조작된 실험 결과와 도표, 데이터, 저자명까지 완비된 논문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이런 논문은 학술 논문의 논리적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부는 AI를 이용해 문장을 짜맞추거나 기존 논문을 교묘히 표절해 냅니다.
T&F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바이오엔지니어드>에는 2021년 한 해에만 1000편이 넘는 논문이 쏟아졌고, 이 중 상당수가 동일한 이미지 재사용, 데이터 조작, 저자 변경 요청 등의 패턴을 보였습니다. T&F의 이번 조치는 역시 저명한 학술지 출판사인 윌리(Wiley)를 상기시켰습니다. 2024년, 윌리는 이전에 인수한 이집트 출판사 힌다위(Hindawi) 계열의 약 250개 저널 중 19개 저널을 폐간했습니다. 윌리는 그 이전에도 페이퍼 밀에서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가짜 논문을 게재한 저널 4종을 폐간한 바 있습니다.
학술 논문의 진실성 문제, 우리도 심각
우리나라에서도 논문 부정행위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개각이 있을 때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후보자들이 논문 표절, 중복 게재, 저자 부당 등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례들이 드러나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 유명 대학 교수는 아들을 자신의 논문 43여 편에 제1 저자 또는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려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복 게재는 워낙 흔해 별문제가 아닌 것처럼 넘어가기도 합니다. 일부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은 ‘관계’를 고려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을 공동 저자로 올려주기도 하고 제자가 쓴 논문에 무임승차 하듯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연구에 기여한 박사과정 학생의 이름을 일부러 누락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한 개인의 윤리성 문제가 아니라, ‘논문 수’가 실적과 승진의 잣대가 되는 구조적 환경, 저자 기여도에 대한 불분명한 기준, 엄정한 감독 및 심사의 부재가 겹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은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라 과학적 연구 결과의 ‘증빙’입니다. 따라서 조작된 논문이 학술지에 실리고, 인용되고, 정책에 반영되기까지 한다면 그 피해는 과학계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학이나 의학 분야의 경우, 허위 데이터에 기반한 치료법이 임상 현장에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고 잘못된 논문을 근거로 입안된 과학기술 투자 전략은 막대한 재정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한 번 실추된 학문에 대한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성실한 연구자들의 노력마저 의심받게 만들고, 후학들에게 ‘편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의 진실성 출판사가 일차적 책임
허위 논문이나 조작된 논문을 게재한 일차적 책임은 해당 저널에 있습니다. T&F가 신규 논문 접수를 중단하고 1000편 이상의 기존 논문에 ‘조사 중’이라는 태그를 붙인 것이나 윌리가 자사 저널을 대거 폐간한 것처럼 학술 출판사가 적극적으로 윤리 문제에 대응하여 학문적 진실성이 떨어지는 논문을 과감히 철회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아무런 기여도 없이 남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 성과에 편승하지 못하도록 ‘저자별 기여도’를 정량적 도구로 밝혀야 합니다. 연구자 개개인의 신원을 명확히 하고, 연구 성과의 관리 및 공유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글로벌 표준 도구인 ORCID(Open Researcher and Contributor ID)의 의무화도 필요합니다.
‘논문 수’ 중심의 실적 평가 관행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비윤리적 유인이 되고 있습니다. 논문 수가 승진·평가에 절대적이기 때문에 ‘서로 이름 올려주는’ 것이 품앗이처럼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종의 뇌물이나 선물로 공동 저자에 이름을 올려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연구 성과의 사회적 파급력, 실제 적용 사례, 교육 기여도 등 다양한 요소가 반영되는 정성적 평가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과학도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오류, 검증과 수정의 과정입니다. 이번 <바이오엔지니어드> 사태는 학문의 자기 정화 능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문제를 인정하고, 공개하고, 개선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학문이라는 공공의 자산을 지키는 길입니다.
"분자 수준부터 생태계와 종까지 생명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고, 이러한 생명체가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탐구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테일러 앤 프랜시스의 웹사이트 사진. 이 출판사는 생명과학 분야에서만 260여종의 온라인 저널을 발간하고 있다. (사진=테일러 앤 프랜시스 웹사이트 캡처)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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