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 계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과거사 청산은 중요한 국정 과제로 추진됐다. 광주항쟁, 제주4·3사건,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사건 등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민주 정부의 정당성이 높아지고 사회정의가 실현됐다. 그러나 북한과 관련된 용공 조작 사건은 여전히 진상규명이 쉽지 않은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한 번 ‘간첩’이나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개인의 삶과 업적은 쉽게 지워지고, 이를 바로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진화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하고 있지만 역량에는 한계가 있어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출간된 『분열의 시대와 사회통합: 사회학자 일랑 고영복의 학문과 삶』은 이러한 과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1997년 국가안전기획부는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일랑 고영복(1928~2011)을 장기 고정간첩으로 발표했다. 일랑은 어용 교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군사정권과 가까운 보수 인사로 알려져 있던 터라 학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랑은 1999년 2월에 풀려났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다. 북한이 보낸 공작원을 만나고 신고하지 않은 것만 유죄가 됐다. 그러나 '간첩' 낙인은 그대로 남았고 아직도 많은 대학 도서관이 그의 저서를 불온 문서로 분류해 열람을 제한하고 있다.
일랑의 후학 10인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그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다시 조명한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대학생 시절에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딜레마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으니 피난할 기회가 없었던 청년, 학생들은 ‘의용군’으로 북한군에 징집됐다. 일랑도 의용군으로 청천강 근방에서 유엔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에서 그는 북한 체제의 실상을 확인하고 휴전 당시에 반공포로가 되어 남한을 선택했다. 석방된 다음에는 첩보부대원으로 국군에서 복무를 마치고 서울대에 복학해 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대 교수가 된 숙부와의 인연 때문에 남파 공작원의 접촉을 받았고, 결국 국가보안법 사건에 휘말렸다. 신고와 가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그의 처지는 분단체제가 만든 이산가족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사당국이 요구하는 전향을 거부하며 일랑은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중간자’로 규정했다. 남도 북도 아닌 ‘중간자’이니 전향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일랑은 ‘중간자’의 개념을 남북 관계만이 아니라 한국의 내부 문제에도 적용했다. 갈등 해소와 통합을 주도하는 ‘중간자’가 있어야 질서도 확립되고 남북통일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중간자’는 언제라도 양쪽의 극단주의자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국 사회에서 일랑이 놓여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는 통일을 위해서는 가교 역할을 하는 ‘교량 집단’이 있어야 하고, 한국 내부의 사회통합을 추진하려면 산업화 과정에서 출현하는 여러 직업 집단 내부의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는 연대 의식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형성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랑의 입장은 유신독재 체제와도 명백하게 다른 것이었다. 반공포로였으니 북한과는 이미 1953년에 결별했다.
과거에 대한 해석은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 반공을 내세운 분단체제의 희생자 개인의 신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일랑의 사례를 보며 대학과 학문의 자유,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이 개인의 명예 회복과 배상, 보상으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진짜 과거사 청산은 비극이 발생한 사회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재발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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