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리 숙인 대통령, 고개 숙인 상법
2026-07-31 06:00:00 2026-07-31 06:00:00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대한민국을 글로벌 인공지능(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함께했다. 정부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미국 빅테크 간의 대규모 투자·협력 성과를 공개했고, 앞선 국민보고회에서는 두 회사의 ‘단군 이래 최대 규모’ 투자 계획이 발표됐다. 대통령이 이재용 회장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감사를 표한 장면이 화제가 됐다.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기업인을 예우하고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 계획을 발표한 그룹 총수들은 정작 해당 회사의 등기이사가 아니다.
 
상법에 따르면 주식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이사회가 담당한다. 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며 회사와 주주를 위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하거나 임무를 소홀히 해 회사와 주주에 손해를 끼치면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진다. 회사의 경영 권한과 책임은 원칙적으로 이사에게 부여되어 있다.
 
반면 ‘그룹 회장’은 상법이 정한 회사의 기관이 아니다. 삼성그룹이나 SK그룹이라는 단일 법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계열사는 서로 다른 주주와 이사회를 가진 독립된 법인이다. 따라서 총수가 특정 계열사의 등기이사가 아니라면 그 회사의 경영에 직접 관여할 법적 권한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통령 해외순방에 대기업 총수를 경제사절단으로 대동하고, 이들이 계열사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직접 발표하도록 한다면, 실질적인 결정은 이사회 밖의 총수가 내리고, 이사회는 이를 사후에 승인하는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하다는 위법을 정부가 ‘공인’하는 셈이 된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영 현실이 사실상 무법인 것을 전 세계에 생중계한 것과 다름없다. 
  
더 큰 문제는 권한과 책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가 성공하면 총수의 과감한 결단으로 평가받지만, 실패하면 손실은 회사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법적 책임은 결정을 승인한 등기이사들이 부담하는 반면,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총수는 미등기 임원이라는 이유로 책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투자에 사용되는 자금 역시 총수 개인의 재산이 아니다. 회사가 영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이며 주주들이 권리를 가진 재산이다. 이를 총수 개인의 시혜나 통 큰 결단으로만 표현하면 회사와 지배주주를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사회는 총수의 지시를 합법적인 회사 결정으로 바꾸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경영진을 감독해야 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다.
 
이러한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은 오랫동안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이사회 밖 총수가 회사 전략을 좌우한다고 인식되면, 시장은 일반주주 소외, 이사회의 견제 실패, 책임 소재의 불명확성과 총수 개인의 사법·승계 위험이 회사로 전이될 가능성을 주가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때 할인은 편견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합리적 가격표가 된다. 
 
해법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총수가 특정 회사의 전략과 투자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면 그 회사의 등기이사가 되어야 한다. 주주총회에서 정식으로 선임되고, 이사회에서 의견을 밝히며, 표결 내용을 기록하고, 다른 이사와 동일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등기이사가 되지 않겠다면 해당 회사의 법적 대표자처럼 행동하거나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
 
대기업 총수가 해당 회사의 법적 대표자로 행동하려면 등기이사가 되어야 한다. (이미지=챗GPT)
 
정부 역시 재벌의 서열보다 법적 대표권을 존중해야 한다. 기업의 투자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는 해당 법인의 대표이사와 책임 있는 등기이사가 참석해야 한다. 국가 행사에서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도 담당 법인과 이사회 승인 여부, 책임자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결정을 내린 사람이 그 결과에 책임지고 모든 주주가 동등하게 보호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기업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국가 무대에 설 만큼 중요한 의사결정권자라면 먼저 이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이 책임도 함께 지는 것, 그것이 선진적인 기업 지배구조의 출발점이다.
 
여전히 상법 밖 총수의 이사회 패싱을 정부가 나서서 ‘공인’하는 한, 주주 보호와 지배구조 개선을 외치는 그 어떤 상법 개정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천경득 변호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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