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급하게 창간됐던 때는 1991년이었다. 양김과 정주영의 삼파전이었고 결국 1992년 12월 YS(김영삼)가 당선됐다. 아직 청계천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문화일보> 사무실은 당시 서린호텔(현 청계한국빌딩)과 옛 동아일보 사옥(현 채널A 빌딩)이 있는 청계천 건너편의 현대해상빌딩 10층과 11층에 들어 있었다. 그때 현대그룹이 신문사를 창간한다면서 창간 멤버로 뽑은 기자가 총 28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민병두 정치부 기자였으며 그는 2004년 이후 2020년까지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모두 민주당(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 더불어민주당) 간판이었다. 그는 <문화일보> 창간 멤버 28명을 가리켜 줄곧 28인의 볼셰비키라 부르며 편집국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후 <문화일보>는 극우를 대변하는 신문이 됐다.
28인 중에 클래식 전문기자가 있었고 우리는 그를 강한잔이라고 불렀다. 원래 이름은 강일모 기자였다. <문화일보>는 석간신문이었고 창간을 준비하던 2개월여 전부터 새벽 5시 출근을 습관화하고 있었는데 마감을 9시에 하면 우르르 몰려 나가 아침을 먹곤 했다. 그 자리에서 아침 해장술이 돌 때 강한잔은 ‘강하게 딱 한 잔 (소주잔) 원샷’만 하고 그 이상 술은 일절 안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들 술을 많이 마실 때였지만 그는 기독교 신도다 뭐다 하며 이런저런 핑계로 음주를 극구 피했었다. 요즘 와서 ‘강한잔’이 유독 기억나는 건, 오랜 음주 끝에 결국 찾게 되는 것이 차가운 소주 딱 한 잔만 입에 털어 넣는, 바로 그 맛이기 때문이다. 딱 한 잔 만이다. 거기서 더 나아 가지 않는다. 나아가는 순간 몸과 정신에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걸 오랜 음주벽의 경험상 잘 알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뒤에 찾게 되는 건 역시 소주다. 주류박람회에서 한 시민이 각 지역별 다양한 소주를 살피고 있다.(사진=뉴시스)
그런데 이 딱 한 잔은 둘이 마시는 것이 좋다. 여럿이 마시면 결국 한잔 더, 가 됐다가 결국 한 병 더, 하기 십상이다. 혼자 마셔도 마찬가지이다. 아까워서 더 마시게 되고 결국 한 병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둘이 마시면 일종의 ‘강제’가 된다. 보기 좋게 딱 한 잔으로 그치게 된다. 그리고 역시 몸에 전류처럼 흐르는 차가운 소주가 여전히 매력적이라며 감탄하게 된다. 소주의 그 느낌은 차가운 생맥주 첫 잔을 마실 때와 같다. 술의 기본은 역시 청량감이다. 다만 요즘 소주 도수가 너무 약해졌다는 것이 불만 아닌 불만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것은 16도 수준의 소주들이다. 서울의 ‘처음처럼’과 부산의 ‘좋은데이’, 제주 ‘한라산’ 정도인데, 부산의 또 다른 소주 C1(시원소주)이 16.9도다. 나머지는 죄 15도대이며 심지어 15도 아래도 있다. 밍밍하다. 15도는 거절. 사람에 따라 16도급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오리지널들을 찾으면 된다. 이른바 빨간 뚜껑 주세요, 하는 참이슬 오리지널 빨간 뚜껑이 20.1도이다. 한라산 오리지널은 21도이다. 이게 옛날 소주 맛이다. 처음처럼도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20도짜리를 출시했지만, 술집에는 잘 없다. 옛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먹던 소주 맛을 찾는다면 참이슬 빨간 뚜껑이 가장 대중적이다. 이걸 먹는 게 낫다. 특히 점심을 먹으면서 반주를 하고 싶다면, 강한잔 스타일로 빨간 뚜껑, 프레쉬를 시켜 딱 한 잔 털어 넣는 것을 권하는 바이다. 대신 차가워야 한다. 딱 한 잔은 건강에 해롭지 않다. 무엇보다 정신 건강에 아주 좋다.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EBS 다큐 채널에 <한국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올라 있다. 수년 전 어느 날의 방송분은 외연도(대천항에서 2시간 거리)에서 고기를 낚는 선장과 두 명의 선원들 얘기였다. 새벽 3시에 나가 오후 2시에 조업을 끝내고 돌아온 선장은 농어 몇 마리를 가져 와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농어는 킬로당 1만2천원에 팔린다. 수산 시장에서는 약 3만5천원이고 이걸 횟집에서 먹으면 6만원까지 나가게 된다. 이 선장의 주변 어부들은 올해의 조업을 이미 마친 상태이다. 섬 전체가 휴어기에 들어간 셈이다. 어부 선장은 부인과 둘이 마주 앉아 농어를 먹으며 소주를 마신다. 그의 말이 인상적이다. “소주 한 잔에 농어 한 점. 두 점 먹는 건 드물어요.” 갓 잡아 올린 농어 맛이 너무 좋아서 한 점만 먹는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소주 한 잔에 두 점 먹는 건 고기를 아끼지 않는 행동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소주 한 잔에 회 한 점의 원칙은 신성하고 거룩한 노동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소주 한 잔의 매력은 여기서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외연도의 어부 선장이 잡아 온 농어 회로 소주 한잔을 마신다. 한 잔에 한 점.(이미지=챗GPT)
다소 외진 지방을 다니면서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약간의 사치감일 수 있다. 일단 생맥주를 파는 데가 많지도 않다. 생맥주는 호스 관리가 중요한데 그걸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생맥주의 신선도가 당연히 떨어진다. 광주의 남광주 시장은 한때 횟집들이 경쟁적으로 문을 연 곳이었고 밑반찬(스끼다시, 쯔끼다시) 가지 수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무진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뉴타운의 개발로 이 노후화된 시장 상권은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남광주 시장은 화순 탄광 광부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라 했다. 그만큼 ‘없는 사람들’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고 광주의 민심이 배어 있던 곳이지만 세상사 모든 것이 시대와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잎새주에 농어 등 회 한 접시의 가성비는 나쁘지 않다. 하모회도 나온다. 하모는 주로 남해안에서 많이 나오는 생선이다. 동쪽에는 통영, 서쪽에는 여수가 본산이다. 부산이나 광주의 맛집에서도 먹을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아나고라 부르는 것은 붕장어이고 이 하모는 갯장어이다. 곰(꼼)장어와 함께 모두 바닷장어이다. 하모는 양파에 싸서 먹어야 한다. 이 하모 양파 냄새는 소주만이 지워낼 수 있다. 기가 막힌 화학적 결합이지만 그게 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보면 아주 과학적 이론인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키스는 금지이다.
해남과 목포에서는 보통들 낙지탕탕이를 먹는다. 산낙지회 비빔밥이 고소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꿈틀대게 만든다. 지레 겁을 먹으면 낙지 빨판이 입천장과 목구멍 사이에 붙는다. 처음부터 무조건, 사정 보지 말고, 몬도가네처럼(!), 질겅질겅 씹어야 한다. 동시에 소주로 낙지를 기절시켜야 한다. 그래도 모자라면 소맥을 말아 한 번에 들이켜는 게 좋다. 여하튼 오늘은 이래저래 소주이다. 자기 자신이 우주의 맥덕(맥주 덕후)임을 천명한 이들이라 해도 종종 소주 ‘강한잔’이 필요한 법이다. 소주는 ‘오버하지만’ 않으면 된다. 물론 그게 잘 안 될 것이다. 소주를 통제할 수 있다면 그건 세상의 경륜을 얻은 셈이 된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게 될 것이다. 세상사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강한잔’의 강일모 기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여전히 소주 딱 한 잔만 마시며 살고 있을까.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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