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끝나지 않은 내전, 21세기형 복합 정치 전쟁
2025-12-04 06:00:00 2025-12-04 06:00:00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기반으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화하며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국제기관의 평가에서도 민주주의 지수가 급락하고 있다. 2022년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이 주요 국가 중 정치 양극화 실태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그 심각성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그 연장선에서 2024년 12월에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헌정 중단의 위기가 빚어졌다.
 
다행히도 내란이 진압되고 헌정 질서는 회복되었지만 병든 민주주의를 치유하는 과정은 멀기만 하다. 이러한 위기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의제도의 근본적 결함, 허약한 정당정치, 그리고 극단화된 여론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에 있다. 현행 권력 구조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무력화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다. 특히, 5년 단임제와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제는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묻기 어렵게 만들고, 야당과의 협치(協治) 유인을 제거한다. 이러한 제왕적 대통령제는 승자독식(winner-takes-all)의 선거제도와 결합하여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1988년 총선부터 적용된 소선거구제 중심의 의회 선거제도는 한국 민주주의를 유례없이 강력한 다수제적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로 진화시켰다. 이 승자독식 방식은 양대 정당이 정치적 자원과 권력을 독점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하며,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대방의 실정을 부각하는 데만 정치적 역량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민주화 이후 심화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체제가 정치적 평등의 달성을 방해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문제도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한국 정치는 외형적으로는 정당들이 많은 당원과 강력한 지도부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후보자 충원 및 책임정치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처럼 정당이 허약한 상황에서 정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한국의 극단적 정치 양극화는 이념과 동원을 위한 정당(‘깃발’로서의 정당)이 효율적인 반면, 대안과 정책을 위한 정당은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당의 주요 의사결정은 당파적 편향이 강한 강성 지지층(팬덤 당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으며, 이들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당내 반대 세력(예: '수박')이나 상대 정당에 대한 공격적 태도를 보이며 정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치적 대립은 이념적 차원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혐오 정서에 근거한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로 심화되고 있다. 이런 양극화에서는 인기 영합 포퓰리스트가 권위를 확보하게 된다. 국민의힘 지지자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모두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도가 90%를 넘는 극단적인 수준이다. 이러한 양극화를 증폭시키는 주범 중 하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특히 유튜브와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이다. 유튜브 정치·시사 채널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 통로이기도 하지만, 정파적 이익 추구와 정보 왜곡의 통로로도 악용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38년. 한국 사회는 갱년기 증상을 보이며 피로에 허덕이고 있다. 내란을 진압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깊어지고 있다. 다수의 폭정으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거의 붕괴된 상황이다. 내란은 진압되었으나 적대와 혐오의 내전은 더 격화된 상황이다. 12·3 빛의 혁명 1년을 맞이한 우리는 단순히 내란 종식만을 외칠 때가 아니라 1987년 체제를 혁신하여 정치개혁의 신기원을 열어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지난해 내란이 진압되었지만 심리적 공간에서는 적대와 혐오의 내전이 더 격화된 21세기형 '복합 정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새로운 평화 설계가 정치 개혁의 본질이며, 진정한 내란 종식이다.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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