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나의 알코올 일지 26)당신이 지축역을 알까?
2026-08-28 12:59:32 2026-08-28 12:59:32
지하철 3호선 고양시 대곡역에서 서울의 길목인 구파발역에 가기까지는 다섯 개의 역을 지나가야 한다. 화정-원당-원흥-삼송-지축이다. 이 구간이 특이한 것은 대곡에서 지상으로 나갔던 열차가 화정에서는 지하로 들어가고 다시 원당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원흥과 삼송에서 또다시 지하로 내려가고 지축에서 또 지상으로 갔다가 구파발에서 완전히 서울 지하철로 된다는 것이다. 오르락내리락, 들락날락하는 것이 아주 흥미롭다. 원래 원흥역이 없었을 때는 역 하나씩 지상과 지하를 오갔다. 그때가 더 특이했다. 열차가 지상으로 나갈 때는 고가 철도를 달린다. 고가 위 지하철 안에서 보이는 지축의 신도시 풍경이 사뭇 놀라움을 준다. 예전에는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축역과 삼송역 주변의 변화에 아주 놀라워한다. 여기가 삼송리야? 한다.
 
지축은 예전에 닥나무(종이 紙)와 싸리나무(한자로는 유대할 때 유, 곧 紐를 쓰지만 여기서는 싸리나무 축으로 읽는다)가 많이 나던 곳이었고 이 시골이 삼송리와 연결되던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 동네들은 닥종이 공예의 원산지이자 빗자루가 만들어지던 곳이었다고 보면 된다. 구파발은 서울 돈화문에서 북한의 신의주로 가는 길목에서 말에게 물과 먹이를 주며 쉬던 곳이었고 그 교통의 요충지를 통해 종이와 빗자루가 한양으로 공수됐을 것이다.
 
장건재 감독의 <지축의 밤>은 지축역에서 우연히 동시에 영화를 촬영하게 된 두 남녀 감독의 이야기이다.(사진=모쿠슈라)
 
지축역은 열차 안에서보다는 열차 바깥으로 나가 고가 위로 열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는 게 좋다. 마치 영화 같다. <은하철도999> 같다. 판타스틱하며 SF스럽다. 오죽했으면 한국 독립영화계의 기린아로 불리는 감독 장건재가(그는 열댓 편에 이르는 독립영화를 찍었다) <지축의 밤>이라는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겠는가. 짐 자무시 감독의 <지상의 밤>(1991)에서 제목과 이야기 구조를 의도적으로 차용한 듯 보이는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지축역에서 시작해서 지축역으로 끝나는 영화이다. 지난 4월에 열린 2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비경쟁 부문인 ‘코리안 시네마’에서 공개됐다. 일반극장 개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축역에서 우연히 동시에 영화를 촬영하게 된 두 남녀 감독의 이야기이다. 짐 자무시의 <지상의 밤>은 뉴욕과 LA, 파리 로마 헬싱키의 택시 안에서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얘기를 옴니버스로 담은 작품이었다.
 
지축역의 분위기는 언뜻 뉴욕 같기도 하고 또 겨울에 보면 언뜻 헬싱키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제일 많이 닮은 동네는 도쿄 JR 라인 사이에 있는 노포 골목길이다. 순전히 고가 철도 및 굴다리 같은 곳에 주점들이 있기 때문인데 이게 해가 진 후 저녁이 되면 아주 그럴 듯하다. 신바시나 우에노에서는 이를 가드시타(ガ?ド下) 노점이라 부른다. 영어의 ‘가드(guard, 방어벽)’ 혹은 ‘거더(girder, 보)’와 일본어 ‘시타(下, 아래)’가 합쳐진 말로, 철교나 고가 아래 공간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외래어 명사로 굳혀졌다.
 
이름의 유래야 뭐가 어떻든 한국식 ‘가드시타’는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른다, 가 아니라 술을 지른다. 그래서 지축역에 내리게 만든다. 혹은 지축역으로 일부러 찾아가게 만든다. 지하철 출구 밖으로는 일본 주점의 상징 아카쵸칭(붉은 제등, 종이등)을 본뜬 투다리 간판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로 어묵 국물에서 만들어지는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온다. 영락없는 소주 각이다. 뜨거운 여름을 다 지내고 태풍이 온다만다 하며, 살짝 비가 뿌려진 후에 이윽고 길바닥이 젖으면 지축의 거리는 24시가 그냥 술시가 되는 분위기이다. 기온이 내려가고 겨울이 되면 이 거리는 경기 북부 사람들에게는 신흥 노포의 거리가 된다. 추울 때는 사랑하는 연인과 따뜻한 국물에 소주를 한잔 강하게 털어 넣고 간단하게 맥주로 입가심을 한 후 함께 둘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좋다. 지긋지긋한 여름의 한복판에서 떠올려지는 풍경이다. 복날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쌀쌀한 날 소주 강하게 한잔!
 
신바시의 가드시타 술집은 대체로 다찌(立ち)형이다. 원래는 서서 먹거나 마시는 형태지만 요즘은 바 형태의 일자형 테이블로 죽 늘어앉아 마시게 돼 있다. 혹은 이 일자형 좌석이 요리사를 보고 미음 자로 둘러쳐져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며 자연히 옆으로 처음 보는 사람의 팔꿈치가 자주 부딪히게 된다. 팔꿈치가 닫고 이두박근이 닿다 보면 술잔이 닿게 되고, 결국 술잔을 부딪치게 된다.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서로 서투른 영어가 튀어나와 돌아다니며 고생을 한다. 일본 술꾼들의 특징은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 많이 마시는 것 같지 않은 데도 쉽게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 사람들은 술의 양과 속도가 빠르긴 하다. 철도 고가 아래 술집에서는 일본이든 한국이든 술 마시는 분위기가 행복하다. 인생에 술이란 것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을비가 내리고 죽은 가수 최헌이 허스키 보이스로 불렀던 <가을비 우산 속에>가 흘러나오면, ‘우주 맥덕(맥주 마니아)’들이 보기에는 안타깝지만, 소주나 막걸리에 전이 제격이다. 지축에서 다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일렬로 달려 서울 종로3가역에 내리면 6번 출구 앞에는 오래된 분위기(빈티지스러운)의 전집들이 있다. ‘행복한 집’이 그중 하나이다. 막걸리 종류만도 십수 개다. 장수, 알밤, 지평 생막걸리 그리고 느린 마을 막걸리,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 심지어 호랭이 막걸리도 있다. 2만 원짜리 모둠전을 시키면 육전과 동태전, 고추전과 깻잎전 그리고 두부와 김치전이 나온다. 낙원상가가 옆구리 코앞이어서 손님 중에는 호주머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노친네’들이 많이 오고 세 명이서 만 원씩을 내면 막걸리 두 병에 모둠전 중짜 하나를 먹을 수 있다. 종로3가 6번 출구 앞 막걸릿집에는 그렇게 전과 막걸리를 앞에 놓고 이유도 없이 이재명 욕을 실컷 해 가면서 거나하게 취한 노인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나이를 술만큼 많이 자신 사람들은 툭하면 나라 꼴이 엉망이라고 하고 이러다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미국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지난 수십 년간 나라는 망하지 않았으며 북에서 쳐들어오지도 않았다. 전과 막걸리가 좋은 것은, 그런 소리에 술맛이 떨어지면 아줌마를 불러 먹던 것을 싸달라고 하면 된다.
 
서울 종로3가역 근처에는 다양한 막걸리와 전을 즐길 수 있는 전집들이 많다.(사진=오동진)
 
막걸리는 딴 데에도 있다. 이때 지하철역 6번 출구를 사이에 두고 젊은이들과 중장년층이 어울리는 호프집이 하나 있다. 이름에 왜 88을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1988년 올림픽 때 나라가 가장 흥했다는 의미일까?) ‘서울88맥주’에는 생맥주가 있고 하이볼이 있다. 레트로하다기 보다는 뉴트로(new-tro)하다. 무엇보다 여기엔 수제 맥주가 있는데 일반 술집에서는 찾기 힘든 인디카 생맥주가 있다. 이 인디카 생맥주는 서울 한남동의 숙성 돼지고기구이 집인 화포식당 한남점에도 있다. 이 화포식당은 고기 맛은 그저 그런대로 오직 인디카 생맥주를 낮부터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다. 게다가 이 술집은 브레이크타임이 없다. 12시에 시작된 낮술을 저녁 8시까지 이어갈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기이한 나라의 술꾼들이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역시 비 오는 가을날 바깥세상이 축축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취기에 젖을 수 있다. 지금 같은 폭염의 시기가 지나면 좋은 사람과 꼭 가고 싶은 곳이다. 오로지 낮술을 위하여.
 
사람이 술에 취하면 여러 유형이 있다. 얼굴이 아주 빨개지는 사람, 살짝 불그레해지는 사람, 머리가 흐트러지는 사람, 말이 많아지는 사람, 혀가 굳는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등등 실로 가지가지이다. 술에 취해서 가장 예쁘고 매력적인 사람은 눈이 젖는 사람이다. 눈으로 서서히 술이 차오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눈망울이 촉촉이 젖는 사람이다. 그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상대는 저절로 술잔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이 맺히는 느낌 때문이다. 눈이 젖는 사람, 가을의 기온, 살짝 처연하게 내리는 비, 그 모든 궁상이 그립다. 궁상이야말로 술안주로 최고다. 한남동에서 낮술을 시작해 종3의 막걸리&전집을 들렀다가 3호선 지축역의 굴다리 노포에서 3차를 끝내면 환상의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런 천하태평이 그립다. 그런 시절이 오겠는가. 언제 있기나 했는가. 당신은 지축역을 아는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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