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원했는데, 정작 얻은 것은 140자(트위터)였다.” 실리콘밸리의 거물 피터 틸의 이 유명한 한탄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그것은 1970년대 이후 인류가 비트(Bit) 기반의 가상 세계에만 안주하느라, 에너지나 교통, 의학 등 물리적 현실(Atom)을 혁신하는 동력을 상실했으며 그 결과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술 진보는 정체되어 있다는 날카로운 문명 비판이자 현실 진단이다. 피터 틸은 이 정체의 원인을 리스크를 회피하는 관료주의와 흉내 내기에 급급한 평준화 문화에서 찾으며, 자신의 막대한 자본과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세상의 규칙을 새로 쓰려 한다.
틸의 해법은 ‘수직적 도약’(Zero to One)이다. 이때, 수직적 도약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모방하는 ‘1에서 n으로의 확장’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는 ‘0에서 1로의 혁신’을 의미한다. 그에게 이 ‘도약’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다투는 ‘제로섬 경쟁’의 굴레를 벗어나 인류가 기술 및 문명의 ‘정체’를 뚫고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피터 틸을 단순한 몽상가나 억만장자 투자자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비전이 이미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실체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공유하는 ‘페이팔 마피아’를 통해 이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그의 동료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는 피터 틸이 한탄했던 '멈춰버린 아톰의 혁신'을 극적으로 부활시킨 사례다. 정부조차 포기했던 우주 개발을 민간의 독점적 기술력으로 돌파하며, 화성 이주라는 인류의 거대한 야망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당겼다. 또한, 그가 알렉스 카프와 함께 창업한 팔란티어는 서구 정부의 정보·국방 시스템을 장악하며 국가 운영 체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납품이 아니라, 국가의 안보와 주권조차 기술 기업의 독보적 역량에 의존하게 만드는 권력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처럼 피터 틸의 담론은 책 속에 머물지 않고, 우주와 국가 안보라는 가장 거대한 물리적 현실을 재조립하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매혹적이고도 강력한 비전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의 유토피아는 민주주의적 합의보다는 소수 엘리트의 결단과 ‘탈출’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망가지면 고치기보다 해상 도시나 우주로 떠나면 그만이라는 ‘구명보트 윤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 기술은 스페이스X의 로켓처럼 비약적으로 도약하겠지만, 그 과실이 소수에게 독점된 ‘기술 봉건주의’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평범한 다수에게 그의 로켓은 탑승할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거나, 자신들을 잉여로 만들 위협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의 비전에는 ‘어떻게 수명을 늘릴 것인가’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늘어난 생존 시간 속에서 인간이 어떤 가치를 발휘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부재하다. 목적과 관계가 결여된 생존의 연장은 축복이라기보다 끝없는 노동의 굴레일지도 모른다. 팔란티어의 감시 기술이 시민의 자유를 옥죄고, 스페이스X의 화성 식민지가 선택받은 자들만의 요새가 될 때, 인류는 ‘기술의 승리’ 속에서 ‘문명의 패배’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강력하게 실현되고 있는 야망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그동안 진보 진영은 폭주하는 욕망에 제동을 걸고 지구의 한계 안에서 소박하지만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하자며, ‘적정기술’과 ‘지속 가능한 성장’ 나아가 ‘탈성장’을 해법으로 제시해왔다. 이는 기후위기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목소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피터 틸과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성취 앞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만으로는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려는 인류의 팽창 본능을 제어하기에 역부족이다. 대중에게 이 길은 ‘더 나은 미래’가 아닌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속박’으로 비치곤 한다. 윤리적 당위성만으로 거대한 기술적 도약을 압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서 제3의 가능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틸의 ‘기술적 도약’을 수용하되, 민주적 정부와 시민의 집단지성에 근거해 그 목적지를 ‘모두의 해방’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이는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인간을 필수재의 희소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기획으로, AI·로봇·청정에너지 등을 통해 주거·에너지·식량의 생산비를 '0'에 수렴하게 만드는 ‘급진적 풍요’를 지향한다.
이 새로운 비전이 꿈꾸는 세상은 단순히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다. 이 비전은 틸이 놓치고 있는 ‘삶의 의미’라는 공백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 강점이 있다. 기술적 풍요에 힘입어 ‘경제적 문제’에서 해방된 시민들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꿈꿨던 ‘좋은 삶’(good life)을 비로소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때, 인간은 우정·예술·공동체를 ‘함께 가꾸고 함께 향유’하며,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잘 사는’(well-being)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도시의 공공도서관이 궁전보다 아름답고, 누구나 걷는 공원이 사유 정원보다 쾌적하며, 시민의 발이 되어주는 대중교통이 개인 승용차보다 안락하다. 그 속에서 시민들은 우정과 아름다움 그리고 공동체를 함께 가꾸고 향유하며 벙커 속에서 홀로 사치를 즐기는 억만장자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인류 역사상 소수의 지배계층만이 독점하던 최상의 품격을 모든 시민의 일상으로 확장하는 '보편적 귀족주의'의 실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비전은, ‘욕망의 억제’가 아닌 ‘욕구의 충만’을 약속하고, 기술의 도약으로 확보한 자유를 모두가 향유할 청사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틸의 ‘유토피아’에 대항할 힘을 지닌다.
결국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갈림길이 놓여 있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탑승하여 화성으로 향하는 피터 틸의 로켓, 지구의 한계 안에서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텃밭, 그리고 기술적 풍요를 바탕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시민들이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정원이 그것이다. ‘틸의 길’은 인류의 팽창 본능에 공명하지만 위태롭고, ‘적정기술의 길’은 안전하지만 인류의 성취욕을 담기엔 좁아 보인다. ‘기술의 정체’보다 더 두려운 것은 ‘상상력의 정체’다. 우리는 어떤 미래에 살고 싶은가? ‘급진적 풍요’를 통해 피터 틸의 ‘도약’과 케인스의 ‘좋은 삶’을 결합하는 ‘제3의 길’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미래를 가장 인간답게 되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