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키와 몸무게만으로 비만을 판정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체중계 눈금은 정상이지만 복부에 지방이 집중된 이른바 ‘마른 비만’ 인구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비만 진단 기준이 도입되면서, 의학계에 큰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매스 제너럴 브리검(Mass General Brigham) 연구팀이 <미국의학협회지(JAMA Network Open)>에 발표한 충격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새로운 비만 정의를 적용할 경우 미국 성인의 비만율은 기존 약 40%에서 70% 수준으로 치솟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비만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체중(Weight)’에서 ‘지방의 위치(Fat Location)’로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미 캘리포니아주에서 한 남성이 줄자를 이용해 허리둘레를 재고 있다. (사진=뉴시스)
‘BMI’를 ‘신체 계측 지표’로 보완
이번 연구는 2025년 초 ‘랜싯 당뇨병 및 내분비학 위원회’가 제안한 새로운 비만 진단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이 ‘변경된 비만 기준’의 핵심은 체질량지수(BMI)의 한계를 신체 계측 지표로 보완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BMI(체중을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값)는 근육량이 많은 운동선수를 비만으로 오진하거나, 근육이 없고 배만 나온 노인층을 정상으로 오진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랜싯의 가이드라인은 비만을 단순히 체중의 과잉으로 보지 않고, 체지방의 분포와 그로 인한 대사적 위험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정의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기준은 비만 환자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진단의 정확도를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BMI 플러스 신체 계측 비만(BMI-plus-anthropometric obesity)’입니다. 이는 기존의 체질량지수(BMI)가 30 이상인 고도 비만군을 대상으로 합니다. 과거에는 BMI 수치만으로 비만을 확정했으나, 새 기준은 여기에 최소 1개 이상의 비정상적인 신체 계측 지표가 동반되는지를 확인합니다. 이는 단순히 체격이 큰 것과 실제 대사적으로 위험한 지방이 축적된 상태를 명확히 구분해, 실질적인 건강 위험군을 선별해내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유형이자 이번 변화의 핵심은 바로 ‘신체 계측 단독 비만(Anthropometric-only obesity)’입니다. 이 기준은 BMI 수치상으로는 정상인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체중계 위에서는 정상 범주에 속하더라도, 허리둘레와 같은 신체 계측 지표에서 2개 이상 비정상 수치가 나타난다면 비만으로 진단하게 됩니다. 이는 흔히 '마른 비만'이라 불리는, 겉보기에는 날씬하지만 내장 지방이 과도하게 축적되어 심혈관 질환이나 당뇨병 위험이 높은 환자들을 의료 시스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실제로 연구 결과 비만율을 70%까지 치솟게 만든 주원인이 바로 이 ‘숨겨진 비만’ 환자들의 발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진단의 핵심 근거가 되는 ‘신체 계측 지표(Anthropometric Measures)’는 이제 BMI보다 더 중요한 건강의 척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내장 지방의 총량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허리둘레, 최근 가장 신뢰도 높은 예측 인자로 급부상한 허리-키 비율, 그리고 복부와 하체 비만을 구분하는 허리-엉덩이 비율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지표들은 체중이 알려주지 못하는 지방의 위치를 파악해 질병 위험도를 예고합니다.
근육 감소와 복부 지방 증가가 동시에 일어나는 노화의 특성 때문에 노인들은 새로운 비만 기준에 부합하는 비중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체육대회에 참가한 노인 선수들이 게이트볼 경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마지막으로, 새 가이드라인은 비만을 단순한 ‘상태’가 아닌 진행되는 ‘질병’으로 보고 단계를 구분했습니다. 아직 장기 손상은 없지만 지방 축적이 확인된 ‘전임상(Preclinical)’ 단계와, 비만으로 인해 당뇨나 고혈압 같은 신체 기능 장애가 이미 시작된 ‘임상(Clinical)’ 단계로 나누어 관리의 시급성을 차별화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은 비만 관리의 초점을 ‘체중 감량’에서 ‘위험한 지방의 제거와 건강 회복’으로 이동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브리검 연구진이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올오브어스(All of Us)’ 연구 프로그램에 등록된 30만명 이상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기존 BMI 기준으로는 비만율이 42.9%였으나, 새 기준을 적용하자 68.6%로 급상승했습니다. 증가한 수치의 대부분은 ‘신체 계측 단독 비만’, 즉 체중은 정상이지만 배가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이 기준의 변화는 노년층에서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70세 이상 성인의 경우, 근육 감소와 복부 지방 증가가 동시에 일어나는 노화의 특성상 무려 80%가 새로운 비만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만 치료 우선순위 변화 예고
이번 연구의 공동 제1저자인 린제이 포먼(Lindsay Fourman) 박사는 “우리는 이미 비만 전염병(epidemic)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70%라는 수치는 경악할 만한 수준”이라며 “이는 체중계의 눈금보다 체성분(Body composition)이 훨씬 중요함을 시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연구 결과, 새롭게 비만으로 분류된 그룹(정상 BMI + 복부비만)은 비만이 아닌 그룹에 비해 당뇨병, 심혈관 질환 발생률 및 사망률이 유의미하게 높았습니다. 이는 복부에 쌓인 내장 지방이 단순히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염증 물질을 분비하고 인슐린 저항성을 유발하는 '독성 장기'처럼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비만 치료와 정책에도 대전환을 예고합니다. 미국 심장협회(AHA)와 비만학회(The Obesity Society)를 포함한 76개 이상의 기관이 이미 이 새로운 표준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 연구의 교신저자인 스티븐 그린스푼(Steven Grinspoon) 박사는 “과거에는 비만 환자로 간주되지 않았던 이들이 심혈관 질환과 당뇨병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이는 현재의 비만 치료제나 치료법이 체중 감량뿐만 아니라 허리둘레 감소와 체지방 재배치에 효과가 있는지 재검토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연구는 우리의 주된 의학적 관심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묻던 시대에서 ‘어디에 살이 쪘는가’를 묻는 시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체중이 정상이라고 안심하기보다 내가 ‘숨겨진 비만환자’는 아닌지 신체 계측 지표들을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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