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망각에 맞서기
2026-07-09 06:00:00 2026-07-09 06:00:0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의 말입니다. 이 격언은 흔히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겪은 피해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소비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에는 가해의 역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으로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 한국에서 베트남전은 한미동맹 강화와 경제성장의 발판으로만 기억돼 왔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희생된 민간인은 9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문을 거듭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정부가 과거사 문제의 공론화를 지양하고 있다"며 사과는커녕 책임 인정도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서서히 망각되고 있습니다. 윤충로 동국대 인구와사회협동연구소 연구초빙교수는 이 망각의 궤적을 두 시기로 나눕니다. 베트남전 종전 이후 1999년까지가 '1차적 망각'이라면, 2000년대 중반 이후는 '2차적 망각'으로 봅니다.
 
1차적 망각이 '폭력에 대한 망각'이었다면, 2차는 '폭력을 잊는다는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2000년을 전후로 민간인 학살 사건이 크게 주목받았음에도, 이후 제도적 해결로는 나아가지 못한 채 망각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하지만 베트남전 학살에서 생존한 피해자들은 온몸으로 이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증언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류탄 파편이 남긴 흉터로, 목소리로, 표정으로 그들은 생생하게 증언하며 지워지길 거부합니다. 프억빈 마을의 생존 피해자 팜티프엉씨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있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요. 백 번이고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요. 한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나는 기꺼이 용서하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법원도 조금씩 응답하고 있습니다. 퐁니 마을 국가배상소송은 대법원에서 심리 중이고, 하미 마을 사건에 대한 진화위의 조사 거부 문제 역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프억빈 마을 생존자들도 3기 진화위에 새로 진실 규명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서사만을 선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한 상처의 자리에 서서 그 상처를 응시하고,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피해자들의 말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대법원의 판단을 앞둔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단순한 배상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해자성을 사유하고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야말로 신채호 선생이 말한 '내일'의 조건일 겁니다. 
 
신다인 공동체부 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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