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늦깎이 주식투자자의 소회
2026-11-03 06:00:00 ㅣ 2026-11-03 06:00:00
그는 이른바 ‘큰손’이자 선수였다. “주식 판을 떠나기 전까지 계좌에 찍힌 돈은 네 돈이 아니다. 이 판을 완전히 떠나게 되는 경우는 딱 두 가지뿐이다. 깜빵에 가거나, 계좌가 빵원이 되거나.” 그의 서늘한 조언 덕분에, 나는 지난 20여년간 주가 창을 보며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었다.
 
2025년 6월4일,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2.26% 상승한 종가 2770.84로 출발한 코스피 지수는 1년 뒤인 2026년 6월19일 장중 9985.59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찍으며 폭주했다. 그사이 5만원대에 머물던 삼성전자는 37만원을 돌파했고, 21만원대였던 SK하이닉스는 300만원에 육박했다.
 
새 정부와 여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코스피 5000 시대’를 천명하며 강력한 자본시장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 일반주주 권리 강화, 주주환원 유도 등 화려한 명분이 시장을 달궜다. 코스피 1만 시대를 목전에 둔 폭등장에 열광했다. 반도체 투톱을 보유하지 않은 이는 바보 취급을 받았고, 술자리와 공원, 공중파와 유튜브 등 눈길이 머무는 모든 곳이 주식 이야기로 도배됐다. 누구보다 그 축제에 도취된 것은 정부와 여당이었다. 
 
하지만 전무후무한 주가 상승이 탁월한 정책 역량이 아니라,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반도체 품귀 현상이 낳은 일시적 반사 이익에 불과하지 않았는지 하는 씁쓸한 의문의 답을 마주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본 권력을 개혁하겠다던 정부가 도리어 자본에 머리를 숙였고, 정치가 기업의 팔을 비틀어 이사회 일원도 아닌 총수가 무리하게 장밋빛 투자 계획을 직접 발표하게 만들며 후진적인 지배구조의 민낯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어나는 계좌의 평가액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는 현실의 기형성을 애써 외면했다.
 
AI 산업의 피크아웃 우려와 레버리지 ETF의 부작용이 맞물리며, 끝을 모르고 오르던 대장주들이 반 토막 나는 데는 불과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부의 대응은 늘 늦고, 무능했고, 그래서 무력했다. 정부의 주가 방어 정책과 주주환원 약속만 믿고 저평가 우량주를 매수했던 투자자들은 오르지도 않은 주식이 덩달아 반 토막 나는 참사를 겪어야 했다.(이른바 ‘주가 누르기 방지법’은 대체 어디에서 표류하고 있는가.)  중복상장 금지 같은 핵심 규제는 사안에 따라 고무줄처럼 잣대가 바뀌었다.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상장 논란 당시 시장의 숱한 경고를 묵살하던 정부는,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나서야 부랴부랴 당정을 동원해 상장 불가 방침을 내놓는 뒷북 촌극을 벌였다. 일관성 없는 땜질식 처방에 정부를 향한 신뢰는 양치기 소년 수준으로 전락했다. 
 
최근 대통령은 증시 폭락의 원인을 “주주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와 경영권 남용” 탓으로 돌리며,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재벌 오너들이 회사 자금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가 연일 보도되어도 이를 방치하는 정부의 그럴듯한 성찬의 말은 더 이상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뒤돌아서서 조소한다. “대통령이 말하는 그 ‘제자리’가 5000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2500을 말하는 건가?”
 
시장은 롤러코스터를 즐기지만, 개미투자자에게 그것은 내려올 수도 없는 생존 게임이다. (이미지=챗GPT)
 
지난 1년은 그저 달콤한 백일몽이었나. 무소불위의 권좌에서 내려와 2평 남짓한 독방에 갇힌 전직 대통령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영화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처럼 찬란했던 한때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걸까. “아무도 주식투자를 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다, 주식은 각자의 선택이다”라는 비아냥에 변명하고 싶지 않다. 오롯이 다 내 탓이다.
 
오늘 장이 열리자 주가가 또다시 요동한다. 지독한 금단현상 탓에 이제는 판을 떠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불나방처럼 다시 따라가야 할지 모니터 앞에서 번뇌하다가, 문득 20년 전 그 선수의 계언(戒言)이 떠올랐다. “도박판에서 돈을 버는 건, 하우스밖에 없다.”
 
그는 6년 형기 중 5년을 복역하고, 얼마 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천경득 변호사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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