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에서 시민참여단 471명은 한 달여의 숙의 끝에 건설 재개를 권고했고, 정부는 그 권고를 수용했다. 이듬해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에서는 어느 방안도 뚜렷한 우위를 얻지 못했고, 정부가 결정의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도 나왔다. 두 경험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 삶을 묶는 공동의 규칙은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시장의 자율적 조정을 중시하는 논자들은 공적으로 정할 규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시장에 맡기라고 답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강조했듯 경제에 필요한 지식은 ‘시간과 장소의 특수한 사정’에 관한 것이어서 수많은 개인에게 흩어져 있다. 가격 체계는 누구도 그 지식 전체를 알거나 매번 합의하지 않아도 각자의 선택을 조율한다. 공론화는 이런 지식을 담아내기 어렵다. 정부가 의제와 참가자를 통제하면 시민의 참여는 이미 정해진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고, ‘국민의 뜻’을 앞세운 결정은 소수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 공적 결정을 넓히기보다 불간섭의 원칙을 지키는 편이 자유에 이롭다는 것이다.
다른 답도 있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규칙은 전문가와 관료가 마련하고, 시민은 결과를 선거로 평가하면 된다는 기술관료적 위임이다. 정책이 복잡할수록 이 답은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늘 배제된 사람들은 자기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제도를 불신하기 쉽고, 그 틈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파고든다. 포퓰리스트는 엘리트가 만든 규칙을 뒤엎고 ‘국민’을 대신해 모든 것을 새로 정하겠다고 약속한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론 아제모을루는 올해 펴낸 『자유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to Liberal Democracy?)』에서 위기의 뿌리를 두 가지로 진단한다. 탈산업화 이후 성장의 성과가 고르게 나뉘지 않았고, 교육받은 엘리트가 폭넓은 동의 없이 정책을 위에서 정해왔다는 것이다. 이 진단에 비추어 그는 세 답 모두에 의문을 던지고, 숙의를 통해 아래로부터 폭넓은 동의를 만들어가는 길에 주목한다. 아일랜드 시민의회가 그 사례다. 2016년 무작위로 뽑힌 시민 99명은 다섯 달간 낙태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두고 전문가와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토론한 끝에 조항 변경을 권고했다. 2018년 국민투표에서는 66.4%가 폐지에 찬성해, 나라를 둘로 가를 듯하던 쟁점에서 폭넓은 동의가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아제모을루가 시장주의를 통째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산된 지식에 관한 하이에크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시장을 ‘사회적 학습’의 장으로 본다. 두 사람의 견해가 갈리는 지점은 자유의 의미다. 그에 따르면 하이에크는 자유를 ‘간섭이 없는 상태’로만 이해한 탓에 두 가지를 놓쳤다. 경제력의 불평등이 국가의 통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실험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고, 개입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비용과 편익을 따져 사회가 숙의로 판단할 문제인데도 민주적 과정을 경계한 나머지 ‘불간섭’이라는 원칙으로 그 답을 미리 못 박았다는 것이다.
아제모을루가 내세우는 원리는 ‘비지배’(nondomination)로, 이는 어떤 사람이나 규범, 제도의 자의적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세 답 모두 한계가 있다. 시장주의는 경제력에 의한 지배를 외면하기 쉽고, 기술관료적 위임은 시민을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존재로만 남겨두며, 포퓰리스트가 쥔 권력은 견제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지배가 될 수 있다. 세 답은 저마다 장점을 내세우지만, 규칙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이 그 규칙을 만들고 바꿀 실질적 권한을 갖는가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못한다.
그 물음에 대한 아제모을루의 답은 ‘자치’(self-government)다. 그에게 자치는 다수의 뜻을 관철하는 절차가 아니라, 시민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권력을 견제하고 공동의 규칙을 바꿀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자치가 또 다른 자의적 권력이 되지 않으려면 다수가 정한 규칙도 기본적 자유와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하이에크의 우려와 달리 아제모을루의 논리를 따르면 압제의 위험은 자치의 과잉보다 결핍에서 더 커질 수 있다. 결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자신을 대변하겠다는 강자에게 결정권을 통째로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고리와 대입 공론화는 결과가 엇갈렸지만 같은 형식을 따랐다. 정부가 쟁점을 골라 시민을 불러 모았고, 시민은 그 질문에 한 번 답한 뒤 해산했다. 이견을 조정하고 원치 않는 결론까지 받아들이는 시민의 역량은 이처럼 쟁점마다 한 번 열리는 공론화만으로는 길러지기 어렵다. 아제모을루가 자치는 공동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치가 비지배의 조건이라는 점은 정치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일터와 서비스 현장에서도 규칙을 정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은 대개 따로 있다. 플랫폼 노동자의 배차와 평가 기준은 알고리즘이 정하고, 돌봄 노동자와 이용자는 서비스 규칙을 만드는 자리에서 빠져 있기 일쑤다. 떠날 곳도, 말할 곳도 없는 사람은 대신 말해주겠다는 목소리에 끌리기 쉽다.
당사자들이 경제활동의 규칙을 함께 만들고 고쳐가는 제도적 실험의 장으로는 사회연대경제가 있다. 가령, 노동자와 이용자가 함께 조합원이 되는 돌봄 사회적협동조합은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권한을 배분해, 현장의 위험과 서비스의 빈틈을 함께 살피며 운영 규칙을 고쳐가게 한다. 참여적 의사결정이 시간과 비용을 늘리고 신속한 경영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지만, 현장 정보를 놓친 결정과 사후 갈등을 수습하는 비용까지 셈하면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공동의 규칙과 이해충돌은 함께 정하고, 일상적 집행은 경영진에 맡기되 구성원이 감독하는 분업이 필요하다.
공동의 규칙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와 자치가 가능하다. 서울 도봉구청에서 열린 시민참여예산 의제 선정을 위한 원탁회의에서 시민들이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물론 사회연대경제 조직이라고 저절로 자치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운영진이 정보를 독점하면 조합원의 의결권은 형식에 그치고, 조합원이 신규 노동자나 이용자를 배제하면 조직은 닫힌 이익집단이 된다. 정부 지원에 기댈수록 구성원의 판단보다 정부의 평가 기준을 따를 위험도 있다. 따라서 새로 제정된 ‘사회연대경제기본법’에 따른 지원은 조직 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치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금융·교육·판로를 지원하는 데까지이며, 결정은 조직에 맡기는 것이 원칙이다. 그만큼 조직에는 정보 공개와 실질적 의결권으로 내부의 자치를 보장하고, 서비스의 질과 일자리의 안정성, 재무적 지속가능성으로 지원의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이 따른다.
이견을 조정하며 공동의 규칙을 만들고 그 결과에 책임져 본 경험은 민주적 절차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신뢰를 키우고,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해 주겠다는 포퓰리즘의 호소력을 줄일 수 있다. 그런 경험을 쌓을 자리를 이제 일터와 지역 곳곳으로 넓혀야 할 시점이다. 아제모을루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는 ‘공동번영’(shared prosperity)과 함께 시민의 발언권을 약속했다. 오늘의 위기는 두 약속이 함께 흔들린 결과이고, 그런 만큼 둘을 다시 세우는 과업도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성장의 성과를 고르게 나누는 과제는 그 성과를 만드는 규칙을 정하는 권한을 더 많은 사람이 나눌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박종현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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